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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 연상호 감독, 또 한번 믿음을 되묻다(인터뷰)


'돼지의 왕' 이은 강렬한 메시지로 관객 만나

[권혜림기자] 수몰이 예정된 시골 마을의 순박한 사람들이 교회 장로를 빙자한 사기꾼의 노림수에 걸려든다. 신앙을 미끼로 사람들로부터 이득을 취하려는 장로 최경석의 악행은 선해보이기만 하는 젊은 목사 성철우를 앞세워 순탄히 이뤄진다.

그러던 중 폭력적인 가장이자 마을의 주정뱅이 김민철은 장로 최경석을 비롯한 교회 세력의 정체를 알게 되고 이를 파헤치기에 나선다. 연상호 감독의 신작 애니메이션 '사이비'의 줄거리다.

줄거리는 말끔하게 정리되지만,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들은 결코 한 두 가지로 축약되지 않는 복잡다단한 고민들에 휩싸일 법하다. 감독은 전작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에 이어 절대적 믿음, 신화화의 함정을 공격한다. '돼지의 왕'이 학교 폭력을 도구로 우상화의 파국을 그렸다면 '사이비'는 종교를 소재로 전작 이상의 질문거리를 던진다.

특히 영화 속 인물들의 힘과 서사가 지닌 풍성함은 '사이비'를 현실 종교 문제에 대한 일갈이라기보다 선과 악의 구분, 그 그을 수 없는 경계에 물음을 던지는 작품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유일하게 진실을 말하는 이가 동네의 망나니고, 그를 제외한 세상이 거룩함을 뒤집어 쓴 거짓에 심취해 있다는 설정이 몰입을 돕는다.

대놓고 악인(惡人)인 듯 보이는 두 남자 경석과 민철, 그리고 선인(善人)이지만 선민(選民)적 사고의 함정에 빠진 목사 철우는 각자의 입장에서 대립한다. 이 과정에서 '사이비'는 주장하는 이의 정체성과 주장 자체의 진위를 서로 떨어뜨려 사고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로 인해 우리가 어떤 함정에 빠질 수 있는지도 자문케 한다.

영화의 개봉을 맞아 조이뉴스24와 만난 연상호 감독은 '사이비'를 통해 풀어내고자 했던 이야기를 풍성하게 들려줬다. 감독은 "'사이비'에는 입장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들의 생각 중 거의 모든 것이 제 생각"이라며 "제가 심심할 때 혼자서 하는 문답법 같은 것을 영화로 만들어냈다"고 설명했다.

이어 "사람들은 모두 연약하고 무언가에 기대려는 경향이 많지 않냐"며 "그런 데 관심이 갔다. 사실 피로감이 높은 이 사회에선 종교 뿐 아니라 힐링(Healing) 열풍도 마찬가지 맥락으로 해석됐다"고 덧붙였다.

지난 2011년과 2012년, '돼지의 왕'으로 세계 애니메이션 영화계에 파장을 일으킨 만큼 차기작을 준비하는 부담 역시 만만치 않았을 터. 연 감독은 "감독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두 번째 작품을 만드는 일"이라며 "두 번째가 첫 번째보다 나을 가능성이 높지 않은 것 같더라"고 털어놨다. 그는 "비슷한 시기 주목받던 감독들의 두 번째 작품을 보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도 말했다.

그러나 스스로 우려한 바와 달리, 연상호 감독에게 소포모어 징크스(Sophomore Jinx)는 없었다. 감독은 두 번째 장편 '사이비'를 통해 전작을 넘어서는 찬사를 얻고 있다. 스페인 히혼국제영화제에서는 애니메이션 부문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관람평을 살펴보면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구분을 떠나 올해 최고의 한국 영화 리스트에 주저 없이 '사이비'를 적겠다는 이들도 적지 않다.

연상호 감독은 "한 선배 감독이 '첫 작품에서 두 번째 작품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너무 쉽고 부드러운 것 아니냐'고 하더라"면서도 "'사이비'를 작업하며 3~4년 간은 시나리오를 전혀 쓰지 못했었다"고 돌이켰다. "마케팅과 투자 배급 등, '돼지의 왕' 때보다 관계된 사람들이 늘어나 점점 공포감이 생기기도 했다"고 말을 이어 간 그는 "지금은 잘 가고 있는 것 같다"며 "공포보다는 '재밌겠다'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사이비'에서는 배우 권해효가 장로 최경석의 목소리를, 양익준이 김민철의 목소리를 맡았다. 오정세가 성철우로, 박희본이 민철의 딸 영선으로 분했다. '사이비'는 지난 21일 개봉해 상영 중이다.

이하 일문일답

-'돼지의 왕'에 이어 다시 절대적인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 사람들은 모두 연약하고 무언가에 기대려는 경향이 많지 않나. 그런 데에 관심이 많이 간다. 저 역시 마찬가지라 고민을 많이 한다. 흥행에 대해서도 그렇다."

-흥행은 어떻게 내다보고 있나?

"관객 10만 명 쯤은 들어야 폐를 끼치지 않을 것 같다. '돼지의 왕'도 폐는 안 끼쳤다. 돈을 못 벌어서 그렇지.(웃음)"

-실감나는 장로의 말투와 대사를 보며 취재를 잘 하지 않았나 생각했다.

"권해효 선배가 많이 만들어줬다. 제가 알기로는 그 분이 교회에 안 다니는데 말투를 잘 알고 있더라. 성철우가 찬송가를 부르는 장면이 있는데 거기선 없는 찬송가를 새로 만들었다. (저작권 문제 때문에) 즉석에서 만든 찬송가다. 찬송가에 잘 쓰이는 비슷한 음으로 만들어냈다. 나는 취재를 열심히 하는 감독이 아니다. 다른 시나리오 작가나 감독에 비해 정말 그렇다. 될 수 있으면 주변 사람들을 통해 이야기를 만든다. 실제 사례들이 영화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종교 문제 뿐 아니라 힐링 열풍에 대한 일격으로도 보인다.

"힐링이 대세이긴 하지 않나. 사람들의 마음이 각박해지고 피로감이 높아지다 보니 그런 것에 많이 기대는 것 같다. 문제의 원인, 피로의 근원을 체계적으로 없앨 구조에 대해 생각하기보다 순간적으로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많이 찾는 듯 싶다. 그러다보니 영화의 개봉 시기가 적절하다는 생각은 했다."

-의외로 많은 곳에서 전작 '돼지의 왕'이 학교 폭력 문제를 꼬집은 영화로 해석됐더라.

"'돼지의 왕' 당시에는 내가 학교 폭력 관련 전문가가 돼 있더라. 어느 간담회 자리에도 간 적이 있다. 그런 것은 어느 정도 감수할 수 있었지만 실망은 했다. 그렇게 읽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밖에' 읽히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단편적으로만 읽으시려 하다보니 실망감이 좀 있었다. '돼지의 왕'은 학창시절을 많이 참고했다. 취재를 많이 해야 하는 내용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사이비'의 공간을 시골의 수몰예정지로 설정한 까닭이 있나?

"시골을 배경으로 한 공포물, 데이빗 린치의 '트윈픽스' 같은 이미지에 동경이 있었다. 평화로운 마을은 공포물의 배경으로 묘한 매력이 있다. 하지만 너무 잘 만든 영화 '살인의 추억' 이후 별로 특별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는 것 같다.(웃음) 시골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내가 완전히 서울 출신이라는 점에 겁을 먹기도 했다. 군대에 있을 때를 제외하면 시골을 거의 가 본 적이 없다. 고립된 장소, 그리고 종말이 예견된 공간이 필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수몰 마을이 아니라 철거촌도 고려했지만 아무래도 마을 내부 커뮤니티가 강해지지 않을 것 같더라. 그렇다고 시골로 설정하자니 내가 너무 모르고, 고민을 했다. 최규석 작가가 시골 출신인데, 수몰 마을로 하는 게 어떻겠냐고 의견을 줬다. (최)규석이네 마을 자체가 어릴 때 수몰된 마을이라더라."

-'사이비'를 쓰게 된 동기가 궁금하다.

"동기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지금 재밌는게 딱 생각이 난다. 예전에 연료 없이 물로만 작동되는 보일러를 개발했다는 박사가 있었다. 말도 안 되는 논리였는데도 시골 아저씨들은 투자를 많이 했다. 그런데 이 박사라는 사람이 반듯해보이지도 않고 딱 봐도 너무 사기꾼인 거다. 전혀 신뢰가 가지 않는 사람이었다. 취재해보니 시골 사람들은 박사에게 사기를 당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엄청난 믿음이었는데, 돌파구가 그것 하나 뿐이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도 외주로 이런 저런 일을 많이 받아 할 때 비슷한 경험을 했었다. 돈은 없고 일은 해야 하고, 너무 몰려 있다보니 딱 사기꾼 같은 사람과도 일을 하게 되더라. 결국 돈을 떼였다. 여러가지를 느꼈다. 믿음의 동력이 뭘까. 아주 뻔한 가짜인데도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거다. 관성이 들어가기 시작하면 (사기꾼이) 얼마나 정교한지는 큰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악인으로 보이는 민철이 유일하게 진실을 말한다는 지점에서, 진영에 따라 정치인들의 주장이 왜곡돼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떠오르기도 했다.

"정치의 맥락에서 많이 따 왔다. 단순히 팩트만 강조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사람의 말인지를 무시하고 받아들인다든지. 말이 맞는지 틀렸는지도 중요하지만 맞는 걸 어떻게 전달하느냐도 중요하지 않나. 사람들은 그런 것까지 신경쓰기 피곤할거다. 그렇게 정교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극단적이긴 하지만, 그런데서 민철 역을 따오긴 했다."

-더빙 배우들의 연기가 훌륭했다는 평이 많다.

"다들 너무 잘했다. 캐릭터 디자인을 했던 최규석은 경석이 실제로 권해효와 닮았다고 하더라. 목소리를 들으며 작업을 해서 더 닮게 그려진 것일 수도 있다. 걱정을 많이 했는데 더빙 작업은 아주 깔끔하게 아주 빨리 끝났다. 저는 지도를 많이 하진 않는다. 가이드로 의도만 보여주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만 설명할 뿐이지, 배우들이 자유롭게 하게 둔다. 놓치고 가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해서만 디렉팅한다."

-민철이 딸 영선에게 '팔자'를 언급하며 단호하게 일갈하는 장면이 강렬했다.

"시나리오를 쓸 때 크게 포인트가 되는 장면들을 먼저 생각하고 쓴다. 그 역시 오프닝과 함께 먼저 생각났던 장면들 중 하나다. 영선이의 대사, 철우가 편지를 읽어주는 장면까지 네 장면은 맨 처음부터 생각했었다."

-'돼지의 왕' 때보다 작업 규모가 커졌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이 더 점점 복잡해진다. '돼지의 왕' 때야 훨씬 부담이 적었다. '사이비'나 다음 영화나 관련된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난다. 마케팅, 투자, 배급 여러가지에서 아무래도 더 복잡해진다. 점점 공포스러웠는데 지금은 잘 가고 있는 것 같다. 공포보다는 '재밌겠군' 하는 생각이다. 아무래도 영화를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고려하면서 가고 있다. 계속 같은 방식으로 쓰면 재미 없으니까."

-두 번째 작품이 데뷔작에 미치지 못한다는 소포모어 징크스를 걱정했을 것도 같다.

"감독에게 제일 중요한 건 두 번째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나는 잘 넘어갔다. 두 번째가 첫 번째보다 나을 가능성이 높지 않은 것 같다. 비슷한 시기 주목받았던 감독들의 두 번째 영화를 보는 것이 쉽지 않다. '사이비' VIP 시사 후 술을 마시면서 선배 감독이 그러더라. '너무 쉽고 부드럽게 넘어가버렸다'고. 정말 쉽게 넘어갔다. '사이비'는 '돼지의 왕' 이전에 쓴 시나리오였고, 이미 시나리오가 몇 개 더 있었다. 그 중 하나 '돼지의 왕'을 만들고 그 이후에 '사이비' 작업에 들어갔다. '사이비'를 작업하며 시나리오를 안 쓴 기간이 길었다. 3~4년 간 전혀 무언가를 못 만들었다. 미리 써놓은 게 있어서 다행이었다.(웃음) 작업을 하면서는 뭔가 극복할 수 있는데 없으면 안절부절하는 편이다. '돼지의 왕' 끝나고 많은 제안이 왔다. 그런데 제 중심이 있어야 자기 걸 하지 않나. 결국 시나리오를 잡아야 가는건데 시나리오는 나오지 않고 제안은 많은 상황이었다. '사이비'가 마지막 작품이 되려나 싶었을 정도였는데, '사이비' 작업이 거의 막판까지 들어갔을 때쯤, 제일 급할 때 다음 시나리오를 다 써버렸다. 좀비가 등장하는 영화다. 작업한 지는 4개월 쯤 됐고, 완성은 내년 말, 공개는 내후년 초나 상반기가 될 것 같다."

-연상호 감독에게도 '사이비' 속 신처럼 절대적인 믿음의 대상이 있나?

"원래 그런 대상을 잘 갖지 못하는 유형이다. 확신을 잘 품지 못하는 편이다. 영화를 하려면 재능이 있다는 확신이 강해야 하는데, 기본적으로 내겐 그게 없었다. 가끔 '천재냐'고 물어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전혀 아니라고 확신한다. '돼지의 왕'까지, 단편 작업만 10년 넘게 했지만 별로 인정받지 못했었다. 단편영화제에서 상을 받거나, 해외영화제에 초청되거나 지원제도에서 지원을 받은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돼지의 왕'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이 묘하게 신기하다."

-'돼지의 왕'에서도, 단편 영화 '창'에서도 그랬지만, '사이비' 역시 엔딩 장면이 뇌리에 강하게 남더라.

"'돼지의 왕'의 엔딩이 세서, 이를 뛰어넘는 엔딩을 생각하려고 했다. 방법도 전작과는 달라야 한다고 봤다. 앞으로도 두 작품 정도는 깜짝 놀랄만한 엔딩을 만들려 한다. 엔딩이 좋아야 영화가 좋게 기억된다고 생각한다.(웃음)"

조이뉴스24 권혜림기자 lima@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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