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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투기' 엄태구·류혜영, 보석같은 신예들의 조합(인터뷰)


엄태화 감독 '잉투기' 남녀 주인공을 만나다

[권혜림기자] 어딘지 긴장한 표정의 남자. 앞사람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할 정도다. 말은 느리다. 내뱉는 말수도 적다. 하지만 느릿한 말씨에선 묘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훤칠한 키, 까무잡잡한 피부, 큼직큼직한 이목구비는 짙은 인상을 만들었다.

여자의 피부는 새하얬다. 늘씬한 팔다리는 가녀린 인상을 풍겼지만 또랑또랑한 말씨와 통통 튀는 웃음소리가 활기를 더했다. 과묵한 옆자리 남자를 대신해 종종 질문의 답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영화 '잉투기'의 두 주연 배우 엄태구와 류혜영은 이렇게나 다른 남녀다. 만나본 배우들 중 역대 최강급 수줍음을 자랑한 엄태구와 과일같은 상큼함을 뿜어낸 류혜영. 각자의 영화 속 모습과도 꽤나 다른 두 배우의 표정을 바라보며 이 출중한 신인들의 재능에 다시 한 번 감복했다.

영화는 시사를 통해 공개되기 전부터 유명 감독들의 극찬으로 화제를 모았다. 특히 박찬욱 감독은 "한국 독립 영화 역사의 또 한 챕터가 시작됐다"는 멘트로 기대를 높였다. 두 배우 역시 박찬욱 감독의 호평이 가장 기억에 남았단다. 엄태구는 "후배들이 대견하고 자랑스럽다는 평을 해 준 박찬욱 감독의 평이 좋았다"고, 류혜영은 "박찬욱 감독의 이야기가 제게도 가장 기억에 남았다"고 말했다.

'잉투기'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칡콩팥'으로 활동하는 '잉여인간' 태식(엄태구 분)이 가상 공간에서 시시때때로 대립하던 '젖존슨'에게 급습을 당하면서 시작되는 영화다. 자신이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모습이 인터넷 상에 퍼져나가자 태식은 굴욕감을 느낀다. '젖존슨'에게 복수를 다짐하는 그는 친한 형 희준(권율 분)과 함께 종합격투기를 배우며 격투소녀 영자(류혜영 분)를 만나게 된다.

엄태구가 연기한 인물 태식의 감정에는 시종일관 분노가 흐른다. 굴욕적 린치를 가한 '젖존슨'의 정체를 찾아내 피의 보복을 하리라 다짐하는 그의 눈에는 기댈 곳 없는 세상을 향한 분노와 함께 눈 앞의 적 '젖존슨'에 대한 복수심이 불타오른다. 유독 낯을 가리는데다 말수도 적은 엄태구의 실제 모습과는 달라도 한참 다른 캐릭터다.

"(엄태구) 태식이 얼마나 외로운 인물인지를 생각하기보다 '그냥 내 인생이 달린 문제다. 젖존슨을 죽이러 가야겠다'는 마음으로 연기했어요. 빈 방에 혼자 누워있는 장면에선 제 실제 모습과 참 많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죠. 저도 혼자 사니 집에 가면 아무도 없거든요. 태식이 누워있는 모습을 보면서 '내 모습이 저렇겠구나' 생각했어요."

류혜영이 맡은 캐릭터 영자는 '젖존슨'을 찾으러 나선 태구에 합세하는 격투 소녀다. 부모 없이 삼촌의 돌봄을 받으며 혼자 살아가는 영자는 방과 후 핑크색 가발을 쓰고 아프리카TV에서 '먹방'을 진행하며 별풍선을 구걸한다.

웬만한 자극엔 무덤덤한 영자는 '젖존슨'과 '칡콩팥'의 '현피'처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아니라면 남의 일엔 별다른 관심을 품지 않는 인물이다. 일상이 돼버린 외로움 속에서 세상만사의 허무맹랑함을 꿰뚫어버린 듯한 이 여고생은 류혜영의 섬세한 눈빛으로 생명력을 얻었다.

"(류혜영) 연기하면서는 영자의 밝은 느낌만 생각했어요. 부모님을 여의고 혼자 살면서 방송을 하고, 학교에선 왕따를 당하는, 슬프고 아픈 아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죠. '내가 너희를 왕따시키는 거야. 너흴 때리고 싶어도 내 손이 아까워 안 때리는 거지' 하면서요. 실제로 영자라는 인물이 있다면, 아마 스스로 외로움을 못 느낄 것 같아요. 남들이 볼 때 영자는 너무 외로운 인물이지만요. 촬영 막바지 감독님의 차를 타고 사무실로 가는데, 작가 언니가 '혜영씨, 많이 힘들죠?'하더라고요. 그 때 모든 감정이 울컥했어요. '네. 영자 진짜 외로운 아이인 것 같아요'라고 답하면서 처음으로 영자가 외로웠을 거라고 느꼈어요."

가발을 쓰고 치킨을 먹으며 '먹방'을 찍는 영자의 모습은 한없이 우스꽝스러운 동시에 가슴 짠한 장면이다. 깨끗하고 널찍한 아파트에 혼자 사는 소녀가 '먹방'으로 사람들의 말초적 관심을 사는 장면은 해소될 수 없는 영자의 고독을 역설한다.

류혜영은 "아프리카 방송을 하는 장면은 자의식을 버리고 촬영했다"며 "'나는 내가 아니다. 나는 그냥 핑크걸이다' 생각하고 찍었다"고 돌이켰다. 이어 "힘들고 웃기고 또 오그라드는 장면이었지만 당시엔 감정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며 "영화로 보니 그 장면이 너무 슬프고 외롭더라"고 덧붙였다.

'잉투기'는 형제 감독과 배우의 만남으로도 시선을 끈 작품이다. 감독 엄태화는 주연 배우 엄태구의 친형. '유숙자'(2010), '숲'(2012) 등 감독의 전작에도 엄태구가 출연한 바 있다. '숲'에서는 류혜영과도 호흡을 맞췄다. 류혜영 역시 '하트바이브레이터'(2011)로 시작, 감독과 세 편을 함께 했다. 두 배우에게 감독과 서로 눈만 봐도 아는 사이가 되진 않았는지 묻자 나란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엄태구) 형의 보면 눈을 보며 이야기하진 않지만 '지금 뭔가 잘 안풀리는구나. 예민하구나' '이건 진짜 오케이구나' '시간이 없어 그냥 넘어가는 거구나' 정도는 안 봐도 느껴지는 것 같아요. 사실 형이랑 말을 거의 안 하거든요. 청소년기에 떨어져있다 보니 어쩌다 그렇게 됐어요. 어릴 때 사진을 보면 형이 내 볼에 뽀뽀를 하고 있거나 껴안고 있는, 그런 오그라드는 사진들도 있는데.(웃음)"

"(류혜영) 저도 감독님과 눈을 잘 안 봐요.(웃음) 너무 많이 놀긴 했죠. 감독님과 있으면 제가 말이 그렇게 많아져요. 제 이야기를 한다는 건, 어딘지 모르게 제가 감독님을 믿고 있기 떄문인 것 같아요. 사실 제가 막 떠드는 건 답안을 원해서는 아니거든요. 넋두리처럼 말을 계속 하는 경향이 있는데, 감독님은 해답을 주시려는 의지는 보이지 않아도 가만히 들어 주세요. 영화를 찍을 때도 그렇게 서로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연기를 맞춰갔죠."

엄태구는 검정고시를 본 뒤 삼수 끝에 대학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그가 연기에 발을 들인 것은 교회에서 선생님의 권유로 촌극을 하면서였다. 연기를 하겠다고 하자, 부모님은 아들의 뜻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연기를 '내 일'이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엄태구) 처음에 뭣도 모르고 연기를 시작했고, 적성에 맞는 것 같지 않아 고민이 많았어요. '하면 되지' 생각하면서도 너무 힘들었고, 2~3년 전부터 심각하게 고민했었죠. '숲'으로 호평을 받은 뒤에도 마찬가지였어요. 돈을 벌지 못했으니까요. 지금도 적성에 맞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해온 게 있으니 잘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있어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으로 버티고 있어요. 부모님이 '잉투기' 시사 때 오셨는데, 기뻐하시는 걸 보며 힘을 얻었어요. 부모님이 즐거워하시는 게 가장 좋아요. 그걸 위해 연기를 계속 하는 것도 같고요."

"학창 시절을 재밌게 보내고 싶어서"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했던 류혜영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영화 작업의 재미를 알게 됐다. 한국영화아카데미의 단편 영화에 출연했던 그는 밤샘 작업을 하며 햄버거를 먹는 스태프들의 모습에 "돈을 많이 벌지 못해도, 이 일을 하며 생활하면 행복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류혜영)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요. 새벽에 봉고차 안에서 햄버거 세트를 한 입 먹는데, 유리 너머 스태프들이 애플박스에서 하하호호 하며 햄버거를 먹고 있었어요. 그 장면이 딱 정지해버린 느낌이었어요. 그 이후 영화가 좋아서 연기를 하게 됐어요. 연출과 편집, 촬영 등 다양한 공부를 했지만 제가 제일 재밌게 잘 할 수 있는 게 연기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연기로 대학을 진학했고요."

작품 자체의 감흥은 물론, 보석같은 신예들의 매력까지 한껏 끄집어낸 '잉투기'는 "한국 독립 영화 역사의 또 한 챕터가 시작됐다"는 박찬욱 감독의 극찬이 아깝지 않은 영화다. 연출을 맡은 엄태화 감독은 제11회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숲'으로 3년 만에 대상을 수상, 영화계의 시선을 모은 바 있다. 영화는 지난 14일 개봉해 상영 중이다.

조이뉴스24 권혜림기자 lima@joynews24.com 사진 박세완기자 park90900@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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