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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안 소설' 경성환, 그가 법대를 그만 둔 까닭은(인터뷰)


"뒤늦은 사춘기, 배우 되겠다 결심"

[권혜림기자] 배우 경성환은 외모에서나 말씨에서나, 한결같이 젠틀한 이미지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귀티가 난다'는 표현이 꼭 들어맞는 흰 피부와 정갈한 이목구비는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러시안 소설' 속 성환의 모습과 더욱 맞아떨어졌다. 출연 배우의 이름을 극 중 배역명으로 사용한 신연식 감독의 선택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지난 2012년 제17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였던 '러시안 소설'은 지난 19일 개봉해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1980년대를 배경으로 시작되는 '러시안 소설'에서 경성환은 최고의 소설가 김기진의 아들 성환으로 분했다. 겉보기엔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지만, 내심 열정 가득한 소설가 지망생 신효(강신효 분)와 존경받는 작가인 아버지를 향해 묘한 열등감을 지닌 인물이다.

"저와 극 중 성환 사이에 비슷한 점이 있을 것이란 이야기를 듣고 나면 고마우면서도 동시에 부담이 됐어요. 아예 다른 캐릭터라 생각하면 편하게 했을 것 같은데 저와 닮았다 생각하니 알다가도 모르겠고, 왠지 더 잘해야 할 것 같고요. 닮은 캐릭터라 하니 그런 부담감이 있었죠."

3천만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러시안 소설'은 영화를 연출한 신연식 감독의 연기 수업을 받던 신인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 작품이다. 문학과 영화의 매력이 조화롭게 어울려 신선한 감흥을 선사한다. 제작 규모나 배우들의 경력만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완성도로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감독을 포함해 스태프가 세 명. 배우들이 간간이 현장 일을 도우며 만들어 나간 영화다.

"제작비가 적었으니 돈을 안 쓸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쓰지 않았어요. 1980년대에 어울리는 의상은 광장시장에서 준비하려다 결국 다 별로라는 생각이 들었고, 감독님의 옷을 빌려 입었어요. '이런 옷은 어디서 난 걸까?'싶은 의상들이었죠. 극 중 제가 입은 통이 넓은 바지도 그렇고요.(웃음)"

감독에게 연기를 배우던 신인들이 작품의 주요 배역에 투입된 만큼 맞춤식 지도도 가능했다. 경성환을 비롯해 강신효와 이재혜 등 '러시안 소설'의 배우들이 신인답지 않은 연기력으로 극을 이끌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다.

"작품엔 감독의 생각이 녹아있잖아요. 감독님의 연기관이 저희에게 잘 전달됐기 때문에 그걸 이해한 뒤 연기를 할 수 있었어요. 톱스타들 중에도 작품에 들어가기 전에 연기 레슨이나 교정을 받는 분들이 있다고 들었어요. 아무래도 제가 제 자신을 볼 수는 없으니까 그런 과정을 겪는 게 맞다고 생각하고요. '러시안 소설'의 시나리오를 처음엔 한 번에 다 못 읽었어요. 양도 많고 복잡해서 두 세번 나눠 읽었죠. 그 뒤에야 이해가 되더라고요."

그가 조근 조근 내뱉는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깔끔하게 정리된 모양새였다. 영화 속 성환 못지 않게 차분하고 논리적인 인상을 줬다. 아니나 다를까, 경성환은 학창 시절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던 모범적인 학생이었단다. 대학 역시 법학과로 입학했다가 뒤늦게 연극영화과 입시를 준비, 늦깍이로 입학한 케이스다.

그는 "어릴 때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집안 분위기 탓에 압박감을 가지고 열심히 지냈다"며 "그 때도 영화를 좋아해 비디오가게에서 일 주일에 열 편 씩은 꼭 빌려봤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이어 "은연중에 나도 저 안에 있는 사람들처럼 나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며 "당시엔 살이 많이 쪘었는데, 자신감이 없어 부모님께 말씀조차 드리지 못했었다"고 돌이켰다.

"창의적인 일을 하고 싶었는데, 법학은 제가 생각했던 공부가 아니었어요. 좋은 성적을 강요하던 시스템에서 자라다 뒤늦은 사춘기를 겪은 거죠. 당시 혼자 운전을 하고 가다 교통사고가 났었는데, 하나도 다치진 않았지만 사고 순간 허무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어 응급실에 앉자 마자 어머니께 '학교를 그만두고 하고 싶은 것을 하겠다'고 선전포고했죠. 사촌 중에 연기를 하는 형들이 있었는데, 대학로 아리랑 소극장에서 공연을 함께 보고 함께 소주를 한 잔 하러 갔었어요. 그 때 '내가 하고 싶은 대화가 이런 거였구나' 생각했어요."

경성환은 중학교 시절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고등학교 2학년이 될 무렵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당시만 해도 변호사를 꿈꾸던 유학생이었지만 인종 차별적 시선과 "큰 가능성을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귀국을 결심했다. 더 어린 시절엔 아버지의 일 때문에 일본에서 1년 쯤 체류했다. 영어와 일본어는 무리 없이 구사한다. 흔치 않은 외국어 능력을 지닌 신인이다.

"우연히 이런 경험들이 쌓였고, 언어 능력을 키울 수 있었어요. 할리우드에서 활동 중인 선배들은 있지만 일본에서 그만큼 활동 중인 배우들은 많지 않잖아요. 열심히 활동해서 배우계의 보아처럼 일본에서도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요. 지금 당장은 연기를 하며 외국어 능력을 써 먹을 곳을 찾기가 쉽지 않지만요.(웃음)"

경성환의 욕심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보다 다양한 캐릭터에 도전해 연기의 폭을 넓히겠다는 것이 그의 계획이다. 경성환은 "특이한 역할들도 탐이 난다"며 "'헤드윅'의 인물들 같은 사회적 소수자들을 연기해보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사실 범죄 심리학에도 관심이 많아요. 사이코패스 캐릭터도 욕심이 나죠. 물론 일상적인 연기도 어렵다고 생각해요. '러시안 소설'의 성환이 그런 케이스였는데, 힘이 들더라고요. 극 중 신효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인물이라면 성환은 마음을 내색하지 않는 사람이잖아요. 내공을 많이 쌓아서 잘 표현해내고 싶어요."

이날 경성환은 자신의 내레이션이 '러시안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장식한 것에 대해 "내가 뭔가를 마무리하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더라"고 말했다. 내내 진중했던 그의 눈에 엷은 미소가 어렸다. 영화 한 편의 서사를 끝맺던 극 중 성환의 목소리처럼, 그의 연기 인생도 잔잔하고 또 올곧을 것만 같았다.

조이뉴스24 권혜림기자 lima@joynews24.com 사진 정소희기자 ss082@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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