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공주'의 섬뜩한 일진, 김현준을 만나다(인터뷰)

[권혜림기자] 영화 '한공주'를 본 뒤 한동안 잊을 수 없는 캐릭터가 있었다. 주인공 한공주(천우희 분)에게 끔찍한 폭행을 가하는 남고생 무리의 우두머리 민호(김현준 분)였다. 감정이라곤 없어 보이는 텅 빈 눈빛은 그의 큰 키와 말끔한 얼굴을 한 순간에 섬뜩한 인상으로 바꿔버렸다.

'한공주'가 독립 극영화 흥행 기록을 갈아엎으며 연이은 호평을 얻고 있는 즈음, 민호를 연기한 배우 김현준을 만났다. 그와 첫 대면을 하기 전, 내심 두려움 섞인 호기심이 일었던 것이 사실이다. 연기 경험이 많지 않은 모델 출신 배우. 당연히 정보도 적다. 그에 대한 기억들 중에는 성폭행 후 고릴라 탈을 벗고 태연한 표정을 짓는 민호의 이미지가 가장 짙었다.

그래서 더 의외였다. 가까이서 이야기를 나눈 신예 김현준의 얼굴에서 영화 속 민호가 풍기던 살벌한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죄책감이라곤 읽히지 않던 무감정한 표정 대신 작은 농담에도 환한 웃음을 짓는 청년만이 보였다. 스크린 속 그 고교생 '일진'이 눈 앞에 있는 순둥이 청년이라니, 믿기 어려웠다. 이쯤 되면 남부럽지 않은 스크린 데뷔다.

그는 "'한공주'에 대한 호평이 아직 실감나지 않는다"며 "주변에서 듣기는 했지만, 아직 좀 어안이벙벙하다"고 운을 뗐다. "첫 영화가 '한공주'라는 것이 영광스럽다"고도 말했다. 영화를 연출한 이수진 감독이 인터뷰 중 그의 눈빛을 칭찬한 것에 대해선 "제게 그런 말씀을 해주신 적은 없었는데, 기사로 칭찬을 보고 나서 정말 감동받았다"며 웃어보였다.

"감독님은 현장에서 차근 차근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감독님의 말씀을 최대한 들으려 했죠. 첫 영화 작업이었는데도, 그래서 오히려 마음이 편했어요. 추상적으로 말해줄 수 있는건데도 제가 이해할 수 있게 말씀해 주셨거든요."

신인 배우들이 흔히 겪는 시행착오 중 하나는 지나치게 힘이 들어간 연기다. 김현준은 신인 배우임에도 불구, 몸에서 힘을 한껏 뺀듯한 모습으로 몰입을 도왔다. 목소리 톤이나 표정을 과장하는 대신 담담한 연기로 캐릭터를 그렸다.

"그 나이대 친구들은 어찌보면 아무 죄책감 없이 어떤 행동을 하거나 장난을 쳤던 것 같아요. 힘을 빼는 작업은 그래서 필요했죠. 세게 하기보다 힘을 줄이고 편안하게 연기하려고 했어요. 상대 배우들과도 이야기를 많이 나눠 편하게 할 수 있었고, 감독님도 믿어주셨죠. 잘 하려고 준비를 많이 했는데,막상 들어가니 첫 신이 너무 떨리는거예요. 그 장면을 잘 넘어가니 조금 편해졌어요."

'한공주' 속 민호는 스테이플러로 동급생 동윤(김최용준 분)의 몸을 사정없이 찍으며 그를 괴롭힌다. 김현준은 "감독님이 민호 캐릭터의 전사(前史)로 아버지가 의사라는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저 역시 그럴 것이라 추측했었다"며 "고등학생이 쉽게 구할 수 없는 의료용 스테이플러를 갖고 다니는 인물 아니냐"고 돌이켰다.

"캐릭터 분석을 많이 하려고 해요. 감정을 잡아 이어가는 데에 필요한 일이잖아요. 대사가 없어도 인물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많은 감정들을 서브텍스트로 준비하려고 하고요. '한공주'는 어려운 소재니, 최대한 한 발짝 뒤에서 접근하려 노력했어요. 궁금증이 없게 잘 알려주신 감독님의 이야기를 흡수하면서요."

최선을 다한 것과는 별개로, 자신의 얼굴이 흐르는 은막을 똑바로 응시하는 것은 신인 배우에게 쉽지 않은 일이다. 김현준에게 첫 영화 연기의 아쉬운 면을 묻자 "그 큰 스크린에 내 얼굴이 그렇게 크게 나오는 것이 처음이었다"며 "보면서도 부끄럽고 낯설어서 얼굴을 가렸을 정도"라고 답했다. 그는 실제로 옷깃으로 얼굴을 가리는 시늉을 하며 멋쩍게 웃어보였다.

"영화를 몇 번 봤는데 완벽해보이진 않아요. 부족함이 많이 보이는데 주변 분들이 좋게 봐주시니 '그래도 완전 못하진 않았구나' 생각하려고 해요. 그래도 제 눈에는 만족스럽지 않죠. 하지만 다시 연기한다면 똑같이 하진 못할 것 같아요. 정말 '초집중'했던 순간이거든요. 하고 나서도 촬영했던 장면이 기억난다면 그건 분명 후회스러운 게 있어서일것이라 생각해요. 끝나고 나니 촬영한 것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더라고요."

김현준은 "부모님께 차마 아직 '한공주'를 보시라고 못했다"며 "시나리오도 다 보셨고 내용도 다 아시지만 글자 텍스트로 보는 것과는 다르니 말씀을 못드리겠더라"고 웃으며 고백하기도 했다. 이어 "아마 친척 분들, 지인들과 보시지 않을까 싶다"고 덧붙였다.

김현준은 패션 모델로 연예계에 데뷔, 연기에 발을 내딛었다. 현재 소속된 초이엔터테인먼트에 발탁된 뒤 '한공주'에 출연하게 됐고 본격적으로 연기의 맛을 봤다. 영화의 개봉과 함께 TV조선 드라마 '불꽃 속으로'의 아역 배우로 브라운관에 얼굴을 비췄다.

"'불꽃 속으로'를 촬영하며 짧고 굵게 다이나믹한 경험들을 해봤어요. 촬영을 하며 머리도 밀어봤고요. 어릴 적부터 TV에서 보던 선배들과 호흡을 맞추니 배우고 느끼는 것이 많죠. 현장에 가면 늘 하나씩 배웠으니까요. 계속 지방 촬영을 했는데, 함께 아역을 연기한 친구들끼리도 굉장히 많이 친해졌어요. 다 같이 '빡빡이'가 되며 더 형제같아졌죠.(웃음)"

김현준의 마스크는 부드러운 선의 꽃미남과는 거리가 멀다. 대신 거칠더라도 남자답고 강인한 이미지에 꼭 들어맞는다. 선이 굵은 외모와 강한 눈빛은 '한공주' 속 민호의 모습과도 맞아떨어졌다. 관객들이 그의 연기에 몰입할 수 있던 데에는 신인답지 않게 여유로운 연기 뿐 아니라 타고난 외모 역시 한 몫을 했다. 진한 눈매와 낮은 목소리는 특히 그랬다.

"민호 역을 연기한 뒤 친구들 사이에서도 욕을 많이 먹었어요. 욕도 다 칭찬으로 들리고 너무 고맙더라고요. 꽃미남 외모가 부럽지 않냐고요? 사람은 자신에게 없는 걸 부러워하곤 하잖아요. 저 또한 그럴 때가 있지만 제가 가진 무기를, 제 자신을 많이 사랑하려고 해요."

진한 인상 때문인지 주로 악역을 제안받는다는 그는 "처음에는 마음이 불편했지만 지금은 자긍심이 있다"며 "악역으로서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생각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어 "선한 역할도 한 번 도전해보고 싶다"며 "실제론 쾌활하고 장난꾸러기 같은 면이 있다"고 웃으며 덧붙였다.

인터뷰의 말미, '상남자'의 매력을 물씬 풍기는 김현준이 순애보 연기에 빠져든 모습을 상상했다. 거친 외모에 귀여운 허당기를 감춘 캐릭터는 어떨까. 쇄도하는 러브콜에 행복한 고민을 하는 김현준의 모습도 자연스레 상상됐다. 머지않아 현실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