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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진 감독 "한공주는 지금 우리를 만나고 있다"(인터뷰)


"그럼에도 살아가려는, 지독한 성장담"

[권혜림기자] 지난 2013년, 제18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영화 '한공주'는 영화제 기간 내내 관계자들의 입을 떠나지 않은 작품이었다. 섬세한 연출과 묵직한 메시지, 주연 배우의 호연이 완성도를 높인 덕이었다.

'한공주'는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친구를 잃고 쫓기듯 전학을 가게 된 공주(천우희 분)가 새로운 곳에서 아픔을 이겨내고 세상 밖으로 나가려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6개월 뒤 공식 개봉하기까지, 영화는 유수의 영화제에서 굵직한 이름의 트로피를 여럿 안았다. 지난 17일 개봉 후엔 예견된 호평이 잇따랐고 개봉 4일 만에 6만 관객을 돌파, 저예산 영화로선 드문 흥행 성적을 내놓고 있다.

영화의 개봉을 맞아 '한공주'를 연출한 이수진 감독을 만났다. 그는 작년 부산국제영화제 당시 관객과의 대화, CGV무비꼴라쥬상과 시민평론가상을 수상한 비전의 밤 행사 등에서 영화 관계자들 앞에 섰었다. 얼굴은 눈에 익었지만 대면해 이야길 나눈 것은 처음이었다. 다소 무겁게 느껴질 수 있는 화제를 꺼내기 전, 적은 제작비로 매끈한 만듦새의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물었다.

"관객은 독립 영화든 상업 영화든 똑같은 돈을 내고 보잖아요. 그런 쪽(완성도)으로 신경을 쓰긴 해요. 요구하지 못할 것에 욕심을 내기보다 할 수 있는 것에서 밀도 있게 그릴 수 있도록요. 우리 영화에 클로즈 업 장면이 많은 것도 그런 이유 중 하나죠. 다행히 그런 연출이 이야기와도 잘 맞았고요. 촬영이나 조명에도 무리하게 큰 장비들이 사용되진 않았지만 한도 내에서 만들 수 있는 것들이 있었어요."

그의 설명대로 '한공주'에는 클로즈 업 신들이 적지 않게 등장하고, 이 장면들은 서사의 흐름과 맞물려 몰입을 돕는다. '한공주'의 관객 중에는 감독의 이름을 확인한 뒤 그를 여성으로 오인하는 이들이 많다. 중성적인 이름 탓도 있겠지만 통상 여성성으로 설명되는 섬세함이 장면 곳곳에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감독의 연출 속에서, 배우는 작은 표정 변화로도 관객을 압도한다. 극 중 여고생들의 소소한 일상에도 리얼리티가 느껴진다.

"여자가 아니어서 그렇게 어려운 지점이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지나가며 본 여고생들의 일상적인 모습일 수도 있고요. 산부인과 진료 중 손을 꼭 쥐는 장면은 공주의 캐릭터에 대해 더 생각했어요. 이 아이에게 그간 어떤 일이 생겼는지 관객들이 몰랐으면 했지만, 진료를 받으며 수치스러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넓은 원통형) 립밤에 입술을 직접 가져가 바르는 장면은 (천)우희에게서 나왔고요."

'한공주'는 영화 그 자체만으로도 완결된 서사를 지닌 작품이다. 그러나 지난 2004년 알려졌던 밀양 여중생 성폭행 사건이 영화의 모티프였던 것도 사실이다. 감독은 행여 영화가 실화를 그대로 옮기려 했다는 오해를 살까 경계해왔다.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였지만 입 밖에 냈다. "실제 사건의 당사자가 영화를 본다면 어떨지 많은 고민을 했을 것 같다"고. "찍기 전은 물론, 지금도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 친구들이 보면 어쩌지?'보다는, '내가 왜 이 이야기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었어요. 너무 흔했고, 영화적으로도 많이 다뤄진 이야기잖아요. 똑같은 이야기면 할 필요가 없을 텐데, 굳이 이 이야기를 해야 하는 이유를 찾으려 했죠. 피해자와 가해자에 대한 이야기보다, 극단적인 상황의 친구가 그럼에도 살아나가려 하는 지독한 성장담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현재에서 이 친구가 만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일 것이란 생각을 하면서요."

'한공주'의 미덕은 주인공의 행보를 지켜보는 덤덤한 시선이다. 감독의 말대로, 관객은 극의 중반부까지 이 소녀에게 불어닥쳤던 엄청난 사건을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 전학을 가고, 산부인과를 찾고, 새 보금자리에 둥지를 틀고, 조용히 노래를 읊조리는 공주에게서 드라마틱한 상흔을 찾아보긴 어렵다. 감독의 의도가 충실히 반영된 연출이다.

영화에 삽입된 음악 역시 이 감독의 연출에 힘을 실어줬다. 아카펠라 팀의 합창과 공주의 목소리로 들려 오는 '차오 벨라 차오(Ciao bella ciao)'는 물론, 공주가 홀로 기타를 치며 부르는 노래도 마찬가지다. 상업 영화와 독립 영화를 오가며 활발한 작업을 해 온 김태성 음악 감독의 힘이 컸다.

"김태성 음악 감독과는 단편 두 편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 작업인데, 개인적으로 고마워요. 김 감독은 제게 첫 음악 감독이고 오랫동안 도움을 준 분이거든요. 제게 6년의 공백이 있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 먼저 시나리오를 주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한공주' 작업을 먼저 제안했어요. 사실 꽤 큰 블록버스터 음악을 해 온 사람이라 '이거 해 줘'라고 말할 수는 없었는데 다음 날 바로 '저 이거 너무 하고 싶어요'라고 답해줘 굉장히 큰 힘이 됐죠."

공주에게 노래는 비로소 찾은 일상의 즐거움인 동시에 그를 다시 옥죄는 족쇄가 된다. 공주의 재능에 찬사를 보내던 친구들의 호의는 의도치 않게 소녀를 또 한 번 쫓기게 만든다. 영화의 결말에 그려지는 공주의 선택은 "잘못한 게 없는" 여고생 한공주의 갈등과 성장을 보다 가까이서 들여다보게 한다. 영화는 '당신의 옆에 공주가 있다면 무슨 말을 해 줄 수 있겠느냐'고 묻는듯하다.

"저도 아직 잘 모르겠어요. 이 영화가 그런 고민을 해보자는, 고민을 공유하자는 이야기고요. 답은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어떤 일이 닥쳤을 때, 고민조차 하지 않는 것보단 고민을 해보는 것이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에 대한 것엔 답이 없잖아요. 이 영화를 사건적으로 혹은 결론적으로 보기보다 근원적인 고민으로 바라봤으면 좋겠어요. 문제에 대한 처벌 역시 필요한 부분이지만, 이런 일들이 왜 발생하는지에 대한 고민들이 충분히 있다면 그런 사건들이 줄어들지 않을까 싶은 거죠. 하나의 답을 내려선 안되는 것 같아요. 어떻게 답을 낼 수 있겠어요."

'한공주'는 지난 2013년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처음 소개돼 CGV무비꼴라쥬상과 시민평론가상을 수상했다. 제13회 마라케시국제영화제와 제43회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대상격인 금별상과 타이거상, 제16회 도빌아시아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 국제비평가상, 관객상 3관왕을 차지했다. 지난 17일 개봉해 상영 중이다.

조이뉴스24 권혜림기자 lima@joynews24.com 사진 정소희기자 ss082@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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