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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디지털시대 아날로그적 사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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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메일이 아무리 빨라도 우편으로 보내온 편지를 받았을 때 느끼는 반가움을 대신할 수 없고, 집 앞까지 배달해주는 인터넷서점의 편리성은 서점을 돌아보다 우연히 좋을 책을 발견했을 때 느끼는 기쁨을 대신하지 못한다.

'사랑'이라는 영화가 그렇다. 우표가 붙여진 편지를 받았을 때 느끼는 반가움과 우연히 좋은 책을 발견했을 때 느끼는 기쁨을 이 영화는 알고 있다. 이 영화는 얼마 전까지 우리가 속해있었던 소위 '아날로그'라고 불리던 시대의 감수성과 분위기를 화면 가득 펼쳐놓고 있다.

'채소'할 때 '채'라고('최'가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던 초등학생 채인호은 전학간 학교에서 정미주라는 예쁜 소녀를 알게된다. 미주를 괴롭히던 같은 반 남학생을 혼내주던 날, 미주로부터 생일파티 초대를 받는다. 집에 있던 귀한 물건을 '꼴랑' 3천원에 팔고, 그 돈을 쥐고 미주에게 줄 머리핀을 사는 인호. 그러나 생일날 찾아간 미주네 집은 아수라장이 돼있다. 빚쟁이들이 몰려와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 인호는 정원에 널브러져 있는 미주의 그림 몇 장을 손에 쥐고 돌아온다.

세월이 흘러 고등학생이 든 인호는 유도부에, 싸움으로도 이름 꽤나 날린다. 인호는 매점에서 새치기하다 상우와 싸움이 붙고, 싸움에서 밀리던 상우는 급기야 깨진 병으로 인호를 찌른다. 이 사건을 계기로 원수가 되기는커녕 친구가 된 두 사람. 퇴원하던 날 찾아간 상우네집 앞에서 인호는 몇 년 전에 헤어졌던 미주를 다시 만난다.

이 영화는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만나 어떻게 사랑했고, 어떻게 지켜주려고 했으며, 또 어떻게 헌신했나를 보여주고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이 영화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충돌하고 사랑으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했던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쉽게 취하고 쉽게 버리는 디지털시대에 사랑때문에 자신의 인생까지 버리는 '바보같은' 남자도 있다는 것을 영화는 말하고 있다.

극 속에서 '바보같은 남자'를 연기했던 주진모는 어쩌면 뻔할 수 있는 이야기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한 여자를 사랑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렸다는, 오래 전에 책 속에 박제돼 버린 이런 이야기가 설득력있게 다가오는 것은 그의 진정성이 담긴 연기 때문이다. 그는 뜻하지 않은 곳에서 사랑하는 여자와 마주쳤을 때, 그 여자를 다른 남자 품에 남겨둔 채 고개를 돌려야했을 때 인호가 느꼈던 복잡미묘한 감정들을 섬세한 표정 연기를 통해 전달한다. 관객들이 인호라는 인물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처음 도전한 사투리 연기 역시 몇몇 대사를 빼고는 자연스럽다.

아날로그적인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 영화는 그러나, 여느 영화 못지않은 구성과 때깔도 보여준다. 미주에게 처음 생일 초대를 받던 날 인호 머리 위에 걸려있던 파란 하늘도, 처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던 밤 인호 앞에 펼쳐져 있던 부산 앞바다도, 감옥에서 미주를 그리는 인호의 발 앞에 떨어진 낙엽도 아날로그적 감수성이 가득 담겨있지만 촌스럽지 않다. 오히려 화려하게 치장된 어느 세트보다 스타일리쉬하다.

인호와 미주가 그 동안 눌러왔던 자신의 감정을 폭발하는 신은 의외로 임팩트가 약해 아쉽지만 이 장면을 빼고는 대체적으로 깔끔한 구성과 편집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에 인호가 출세 가도를 달릴 수 있게 도와 준 유회장이 말한다. "여자는 순간이다." 인호는 그 말에 이렇게 답한다. "저는 아닙니다." 사랑을 밝고 가볍게만 그리는 영화들에 식상했다면 이 가을 한 남자의 우직한 사랑이야기에 귀를 한번 기울여 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조이뉴스24 이지영기자 jyl@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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