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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정' 엄태구, 제 몫을 해내는 배우(인터뷰)


"송강호의 배려 덕에 뛰어 놀 수 있었다"

[권혜림기자] 영화 '밀정'(감독 김지운, 제작 영화사 그림㈜)에 캐스팅된 것은 엄태구에게 꿈 같은 일이었다. 단편과 장편을 오가며 다수의 독립영화에 출연해 내공을 쌓았고 이후엔 여러 편의 상업영화에서도 관객을 만난 바 있지만 '밀정'과 같은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큰 비중을 맡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영화의 메가폰을 잡은 이는 김지운이라는, 묵직한 존재감을 지닌 중견 감독이었다. 또렷한 색채로 관객들의 사랑을 받아 온 명감독이자 엄태구의 입장에선 오래도록 선망의 대상이었던 사람이기도 했다. 함께 호흡을 나눌 상대역은 '국민 배우' 송강호였으니, '밀정'은 엄태구에게 긴 설명이 필요 없는 '꿈의 현장'이었다.

그리고 '밀정'을 통해 엄태구는 어느덧 대작 상업 영화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해내는 믿음직한 배우로 성장해 있었다.

'밀정'은 1920년대 말, 일제의 주요시설을 파괴하기 위해 상해에서 경성으로 폭탄을 들여오려는 의열단과 이를 쫓는 일본 경찰 사이의 숨막히는 암투와 회유, 교란 작전을 담은 작품이다.

극 중 엄태구는 조선인이지만 일본 경찰로 일하며 의열단 체포에 앞장서는 하시모토 역을 맡았다. 영화에서 하시모토와 사사건건 부딪히는 주요 인물은 바로 주인공 이정출(송강호 분)이다. 의열단 체포라는 같은 목적 아래 한 배를 탄 두 사람이지만, 조직 내 팽팽하게 힘을 겨루는 라이벌이기도 하다.

두 인물 간의 긴밀한 갈등 관계 덕분에, 엄태구는 이견 없이 충무로 톱배우로 꼽히는 송강호와 가장 가까이서 호흡을 나눌 수 있었다. 대선배 배우 앞에서 주눅듦 없이 인물의 욕망을 그려내야 했던 그는 송강호의 배려 덕에 제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다고 돌이켰다.

"제가 긴장하고 가면, 늘 재밌게 해주셨어요. 저를 존중해주신다는 것이 다 느껴져서 감사했죠. 제가 앞에서 뛰어 놀 수 있게 해주신 셈이에요. 촬영 후 개봉을 앞두고 인터뷰를 할 때도 챙겨주시는 것이 느껴지니 정말 그렇죠. 끝까지 후배를 배려해주시려는 마음이 감사해요. 연기를 시작할 때 '좋은 사람이 좋은 배우가 된다'는 것을 상투적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런 분을 보고 나니 귀감이 많이 됐어요. 그 말이 몸으로 습득되는 느낌이었죠."

영화에서 하시모토는 때로 이정출을 아래로 내려다보기도, 때로 치열하게 의심하기도 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잔뜩 긴장한 후배를 살뜰히 배려하는 송강호를 현장에서 마주할 때마다, 엄태구는 잠시 캐릭터를 잊고 상대를 향한 깊은 존경에 심취하기도 했다.

"한 번은 신을 준비하다 스스로 놀란 적이 있어요. 하시모토와 이정출의 관계를 연기해야 하니 저의 눈도 하시모토가 이정출을 보는 눈빛이어야 했는데, 어느 순간 제가 선배를 보는 눈으로 이정출을 보고 있는 거예요. 너무 좋아하니까.(웃음) 안 그래도 팬인데 저를 그렇게 챙겨주시니 더 광팬이 됐거든요. '정신 차려야지' 생각했어요. 그 정도로 송강호 선배가 좋았고, 대단하게 느껴졌어요. 연기는, 그저 신기할 정도였죠."

과거 영화 '차이나타운'으로 조이뉴스24와 만났을 당시, 엄태구는 "오디션에 약한 편"이라고 자신을 설명했었다. 긴장이 돼 평소 연습한 것 만큼도 다 보여주지 못하고 오디션장을 나올 때가 많았다며 아쉬움을 토로했었다. '밀정'의 오디션을 위해 사무실 계단을 오를 때도 "너무 긴장해 딸꾹질을 했다"는 그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너무 간절했기 때문에 최선을 다했던 기억이 난다"고 답했다.

쟁쟁한 배우들이 탐을 냈던 하시모토 역을 꿰차게 됐던 순간을 떠올리며 엄태구는 "전화를 받고 '아아아아'라는 소리가 나올 만큼 좋았지만, 2초 만에 잘 할 수 있을지 불안해졌고 도망을 가고 싶어졌다"고 고백했다. 오디션장에서 모든 실력을 보여주지 못했음에도 자신을 하시모토 역에 낙점해준 김지운 감독을 향해, 엄태구는 뜨거운 고마움을 보냈다.

"감독님께 정말 감사하죠. 왜 저를 뽑으셨는지 직접적으로 여쭤보진 않았는데, 다른 부분에서 더 좋은 배우들이 분명 있었지만 운 좋게 저의 어떤 부분이 감독님의 눈에 들어 캐스팅이 됐다는 뒷이야길 들었어요. 운이 좋았던 셈이죠. 사실 저를 캐스팅하는 것이 감독님의 입장에선 모험일 수도 있잖아요. '나를 뽑다니 대단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저처럼 인지도 없는 배우에게도 기회를 주시는 것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오디션을 볼 때도 '하시모토 역은 내가 아니겠구나' 생각했었거든요."

하시모토는 극 중 일본말에도 조선말에도 능숙한 인물이다. "둘이 있을 땐 조선말로 하라"는 이정출의 대사로 그 역시 이정출과 같은 조선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지만, 하시모토의 전사에 대해선 자세히 언급되지 않는다. 엄태구는 배역에 몰입할 수 있었던 극 중 설정을 알리며 편집된 장면에 대해 알렸다. 조선인 하시모토가 일본 경찰로 제국주의 통치 세력에 헌신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극 중 히가시(츠루미 신고 분)가 제 어깨를 두드리며 '이번에 자네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고 말하는 부분이 있었어요. 하시모토가 히가시의 기대를 채우기 위해 더 필사적으로 나서게 되는, '이번 일에 인생이 걸렸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장면이었죠. '자네도 조선인이지?'라고 묻는 장면도 있었고요. 여기서 하시모토는 '너무 어릴 때 일본에 귀화해 조선에 대한 기억이 없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전혀 하고 있지 않다'고 답해요. 하시모토의 이야기가 그의 아버지와도 관련이 있다는 생각을 하며 전사를 상상했어요."

엄태구의 형은 잘 알려진대로 신작 영화 '가려진 시간'의 개봉을 앞두고 있는 엄태화 감독이다. 단편 영화 '숲'을 통해 한국영화계에 엄태화-엄태구라는 출중한 형제의 등장을 알린 인물이기도 하다. 형제는 여타 단편을 비롯해 독립 장편 영화 '잉투기'에서도 호흡을 나눴다. 형과의 작업에 대해, 그리고 '밀정' 홍보 일정 외 최근의 근황에 대해 물었다.

"형이 영화에서 이런 저런 역을 시킬 때면 툴툴대면서도 계속 출연하곤 했어요. 최근 '잉투기' GV를 했는데 형이 제가 전보다 말을 엄청 잘 하게 됐다고 엄마에게 이야기했더라고요.(웃음) 지금은 형이 아닌 친한 동생이 연출을 맡은 단편 영화를 작업 중이에요. 멜로이자 로맨틱코미디 장르의 단편이죠. 친한 동생과 같이 하니 오히려 부담이 돼 며칠 간 살이 빠질 정도였어요.(웃음)"

한편 '밀정'은 지난 7일 개봉해 누적 관객 600만 명을 돌파하며 상영 중이다.

조이뉴스24 권혜림기자 lima@joynews24.com 사진 이영훈기자 rok6658@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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