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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하루' 김종관 감독, 진실과 거짓의 경계에서(인터뷰)


"창작 작업과 연애의 공통점, 소통과 교감"

(본 기사에는 영화의 결말에 대한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권혜림기자] 영화 '최악의 하루'(감독 김종관, 제작 ㈜인디스토리)의 카메라는 여주인공 은희(한예리 분)의 하루를 가만히 쫓는다. 배우 지망생인 은희가 연기를 배우는 시퀀스부터 출판 기념 행사를 위해 한국을 찾은 일본 작가 료헤이(이와세 료 분)와의 조우, 잠시 헤어졌다 재회한 연인 현오(권율 분)와의 만남, SNS를 통해 은희의 위치를 알게 된 전 연인 운철(이희준 분)의 방문 등 정갈하게 이어지는 순차적 서사가 영화의 줄거리다.

하루 동안 이어지는 세 남성과의 만남, 헤어짐, 재회는 어느 볕 좋은 날 은희의 하루를 예기치 못하게 헝클어버리고 만다. 이들 중 두 남성과 은희의 연애사가 굴곡지게 된 데엔 오해와 위선에 기반한 소통 불가능성이 자리한다. 막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배우 현오는 촬영 중 짬을 내 은희를 만나지만 모자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꽁꽁 싸맨 모습이다. 유부남이었던 운철은 결국 은희가 아닌 가정을 지키기로 했다는 다짐을 "행복해지지 않기로 했다"는 허울 좋은 표현을 빌려 고백한다.

영화에서 은희가 보다 긴밀한 소통을 이뤄내는 대상은 한국어를 쓰는 한국인인 현오, 운철이 아닌 일본인 료헤이다. 만남의 우연성, 언어적 장벽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간단한 영어 대화와 몸짓, 눈빛으로 서로의 꿈과 일상을 나눈다. 영화는 엉망이 되어버린 은희의 하루를 정리하는 방식으로 두 사람의 재회를 비춘다. 어두워진 산책로를 걷는 두 사람의 모습은 시각적으로도 아름답지만, 정서적으로도 더없이 평온하고 희망적이다.

영화를 만든 김종관 감독은 다수의 단편 영화로 마니아 관객들을 보유한 인물이다. 배우 정유미의 데뷔작으로 잘 알려진 '폴라로이드 작동법'은 오랜 시간 영화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단편을 묶은 영화 '연인들'은 물론, 옴니버스 형식의 '조금만 더 가까이' 역시 김종관 감독의 영화 세계를 음미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최악의 하루'를 통해 관객을 만나고 있는 김 감독은 영화가 그리는 인물들의 관계와 영화 창작 작업 사이의 공통 분모를 "소통과 교감"이라 꼽았다. "손을 내밀고 '내 이야기를 들어 주세요'라고 말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창작 작업과 연애가 닮아 있다"는 것이 감독의 이야기다. 진심을 전하기 위해 진실을 숨겨야 했던 은희, 그리고 진실 위에 거짓을 입혀 진심을 전하는 감독의 숙명은 분명 닮아있었다.

"연애를 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건 소통과 교감이에요. 영화 속 은희가 이 사람들과 관계에서 얻고자 하는 것도 마찬가지죠. 그것을 위해 자신을 바꾸기도 하고요. 창작자들 역시 진심을 전하려 거짓말을 하기도 하잖아요. 거짓말로 진심을 전하려 한다는 점에서, 은희가 하는 노력과 료헤이가 하는 노력은 같은 것이라 생각해요. 웃으면서 기분 좋게 영화를 보셨으면 좋겠어요."

'최악의 하루'는 지난 25일 개봉해 상영 중이다.

이하 김종관 감독과 일문일답

-상대에 따라 은희의 소통 방식이 달라진다. 과장해 말하면 인격이 달라진다고도 볼 수 있는데, 이런 캐릭터를 그리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나에게도 이중성, 삼중성, 사중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부모님 앞에서, 친구들 앞에서 형성되는 성격이 다르지 않나. 그런 부분들이 부딪히며 벌어지는 일들을 생각했다. 배우 한예리가 한 이야기 중 재밌었던 것이 있는데, '여기서는 다 거짓말을 하는데 사실 다 진심'이라는 이야기였다. 자기를 잃어버린 한 여자가 상대에게 맞추기 위해, 상대방이 좋아하는 사람을 연기하기 위해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나. 그런 한 여자의 방황에 대한 이야기다."

-은희가 처한 난처한 상황은 물론, 남성 캐릭터들과의 관계에서도 미묘한 코미디가 녹아있다.

"보통 '로맨틱 코미디'라 하면 많이 과장하는 부분이 있는데, 말한대로 미묘한 톤을 지닌 일상적인 코미디가 가볍고 기분 좋은 것 같다. 그런 영화들이 많이 없으니, 새로운 모델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배우들끼리 재밌게 작업했다. 내용에 대한 지지와 응원 없이는 할 수 없는 작업이었다. 개런티를 많이 가져가려는 의도도 없이, 즐겁게 한다는 생각으로 참여했다. 나도 그걸 아니까 배우들도 많이 즐거워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임했다."

-한예리는 은희 캐릭터에 적역인 배우였던 것 같다.

"오래 되진 않았는데, 한예리는 작년에 했던 간단한 트레일러 작업으로 알게 됐다. 단편에 목소리 출연을 하기도 했고 그런 인연으로 알게 됐는데, 시나리오를 쓰면서 너무 밝은 에너지를 가진 사람보다는 조금 차분한 어조가 있는 사람이 어울릴 것 같다 생각했다. 한예리에겐 그런 분위기가 있다. 그런 배우가 관계에 따라 성격이 다르게 형성되는 여자를 연기하면 재밌게 표현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은희는 어떤 면에선 착하지 않다고 볼 수도 있지만, 사람들이 그를 사랑스럽게 느끼길 바랐다. 그런 면에서 한예리는 내가 원하는 부분을 가진 배우였다.

이희준과 권율도 마찬가지였는데, 캐스팅이 중요한 영화였다. 행운이 따른 셈이다. 현실적인 것으로 재미를 만들고 싶어하는 면도 있지만, 내가 처음에 영화를 좋아한 건 영화가 아름다운 세상을 보여줘서이기도 했다. 내가 가진 일상에서의 아름다움도 있지만 그 안에 비천한 사람의 감정과 리얼함도 있지 않나. 그것으로 영화를 만들고 싶어하는 것 같다.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는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는 감정을 묘사하는 영화다. 그런 부분에서 여배우들과 하는 일이 재미있었다."

-유독 여자 배우들과 많은 작업을 했다. 여성 캐릭터가 전면에 있는 작품들도 많다.

"남자 이야기도 하고싶기는 한데 단편 때 많이 했으니.(웃음) 요즘 새삼 드는 생각은 여자들의 이야기가 재미있다는 점이다. 나에겐 그렇다. 한국 상업영화가 다 남자들 위주의 이야기로 돌아가고 있지 않나. 남들 다 북쪽으로 갈때 남쪽으로 가는 것도 중요한 것 같다.

영화계에 여배우들에 대한 영화들이 많지 않다. 그런데 세상에 좋은 여배우들은 정말 많다. 이는 내가 작은 영화를 해도 좋은 배우들을 캐스팅할 수 있는 근간이기도 하다. 굳이 여배우들과만 작업을 하겠다는 것은 아니고, 관계를 다루는 여러 작업을 하고 싶지만 그런 이야기에 많은 매력을 느낀다는 뜻이다."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그린 만큼, 전작에서도 이번 영화에서도 감독의 실제 연애 경험이 꽤 반영됐을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처럼 한다.(웃음) 연애를 하면서 아름답게 보이고 싶어하면서도 때로 자신의 모순을 잘 느끼고, 어떤 부분에 결핍이 있는지, 약한지를 잘 알게 되는 것 같다. 연애 후 자기 반성의 시간에 느끼는 감정도 중요한 것 같다. 이 영화도 그런 면에서 스스로 느끼는 모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사회적인 모순에 집중한 영화도 많지만 개인의 사소함 사이에 있는 모순의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해서 재밌게 볼 수 있는 영화가 됐으면 했다."

-여배우들이 가진 표현의 결을 잘 살리는 감독이란 생각이 드는데.

"허진호 감독님의 영화를 좋아한다. '봄날은 간다'나 '8월의 크리스마스'나 모두 멀리 있는 연애가 아니지 않나. 실감도 나고, 내가 겪었던 감정을 묘사한 듯한 아름다운 영화들이다. 한국영화에서 멜로는 대개 판타지하게 가더라. 로맨틱 코미디의 경우도 사실 우리와 먼 이야기로 느껴지곤 하는데 현실적인 베이스가 있는 영화들에 마음이 간다. 진중하고, 결이 고운 이야기들."

-'조금만 더 가까이'에서도 느꼈지만 연인 간 다툼을 묘사하는 재주가 탁월한 것 같다. 실제 연인들의 다툼을 관찰하는 기분이 들 정도다.

"지금 그러고 살진 않는데, 사람을 만나며 느끼는 모순이 있지 않나.(웃음) 연애에 대해서만 착안하는 것은 아니고, 사람과의 관계가 집약된 결과다. 어쨌든 모두 내가 느끼고, 알고 있는 감정들이다. 극단으로 과장하거나 조금 더 웃기게, 치열하게 만들긴 하지만 어느 면에선 덜어내기도 한다. 실제 연애가 더 치열하고. 더 상대를 욕보이고, 나쁠 수도 있는 거다. 어쨌든 영화라는 건 일기장이 될 순 없다. 내가 만들어낸 이야기, 가상의 공간, 가상의 인물로 만드는 이야기니까. 내가 본 사람들, 느낀 감정을 녹이긴 하지만 일기가 되지는 않는다. 만들어낸 것 뿐이다. '최악의 하루'도 연애에 대한 이야기지만 외피는 창작에 대한 이야기 아닌가. 거짓말과 허구, 진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은희와 료헤이의 엔딩은 무척이나 낙관적이다.

"그래야 했다. 사실 은희의 하루는 이 사람의 인생에서 큰 사건이 아닐 수 있다. 인생에서 흘러가는 하루, 운이 나쁜 하루일 뿐이니까. 그 다음에 좋은 일이 있을 수도, 나쁜 일이 있을 수도 있다."

-은희의 거짓말이 들통나는 소위 '삼자대면' 장면에선 흔한 한국영화들과 달리 폭력적 정서가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이 좋더라.

"위협감이 없는 것이 중요했다. 그런 식의 무게가 없고 가볍게 가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했다. 어쨌든 이 영화는 우스꽝스럽고, 또 우리와 닮아 있지 않나. 기분 좋게 짧은 소동극이라 받아들여주길 바란다. 은희는 그런 타격에도 웃고 즐길 수 있는 사람이다. 멋있는 성격이라 생각한다. 료헤이를 만나서 소통하기도 하고, 멋있는 성격의 여자다. 위기 대처 능력도 뛰어나고.(웃음) 물론 몇 가지 실수도 하고 안 착한 면도 있지만 살면서 좋은 관계의 사람을 만났다면 그럴 일도 없었을 것이다. 낙관적 힘이 있는 영화가 되길 바랐다."

-료헤이와 기자 현경(최유화 분)의 대화 시퀀스는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의심하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영화 자체가 은희의 이야기로만 읽히지 않길 바랐다. 은희는 연기는 못하지만 관계에 있어서는 연기를 잘 하는 인물 아닌가. 이 사람의 진심과 허구 못지않게 료헤이라는 작가의 이야기에도 허구와 생각, 거짓말이 있다. 내가 영화를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것들을 연결짓고 싶었다. 어느 면에서 현경이나 은희는 직접적이진 않으나 료헤이가 만들어 낸 등장 인물과도 닮아 있지 않나. 그렇게 확장되면 단순히 이야기로만 흘러가지 않고 창작 행위에 대한 은유가 될 수도 있다 생각했다. 우리 삶에는 약간의 비일상적 순간들이 있지 않나. '비밀은 없다'에서 주목받았던 배우 최유화는 이경미 감독의 소개를 받고 알게 됐다."

-은희와 료헤이의 언어를 뛰어넘는 소통과 관계가 흥미로웠다.

"은희는 두 남자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한다. 료헤이는 한국적 상황에 타자로서 와서 무례함을 겪는 인물이다. 출판사 사장의 무례함에 의해 뭔가를 침범 당하고 당황한다. 수동적이고, 상황을 방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거기서 생기는 코미디인 것 같다. 이 영화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이자 타자의 시선으로 보는 이야기다. 말이 안통하는 관계에서 서로 다른 말을 쓰며 소통을 이루게 된다. 삼개국어가 있는 영화가 되길 바라기도 했다.

영어를 쓰지만 실력이 들쭉날쭉해도, 아주 잘하는 실력은 아닌 것 같은데도, 왜 비영어권끼리 서로 히어링이 잘 되는 면이 있지 않나. 그런 부분들을 좀 더 잘 설계했다. 이와세 료, 한예리가 잘 해줬다. 영어 연기가 어색하거나 느끼해 질 수 있는데 담백하게 잘 연기해준 것 같다."

조이뉴스24 권혜림기자 lima@joynews24.com 사진 조성우기자 xconfind@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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