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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용감한 배우, '우리선희' 정유미 추천서(인터뷰)


홍상수 신작 '우리선희'서 세 남자와 얽힌 여주인공 선희 역

[권혜림기자] 정지우 감독의 영화 '사랑니'(2005)에서 교복을 입고 긴 생머리를 양 쪽으로 곱게 땋은 모습. 세상 햇빛을 다 삼킨 양 맑은 얼굴로 모든 것을 잃은 듯 엉엉 우는 얼굴이 배우 정유미의 첫 인상이었다. 장편 데뷔작 '사랑니'에서 극 중 여주인공 인영의 어린 시절을 연기했던 스물 두어 살 정유미는 신비롭게도 그 아이같은 표정을 그대로 간직한 채 8년을 지나왔다.

그 동안 정유미는 엉뚱하게 사랑스럽거나, 당차게 정의롭거나, 때로 뻔뻔하게 남심을 홀리는 인물들로 분했다. 관객의 머리와 가슴에도 그의 이름이 영화의 제목이나 캐릭터의 이름, 몇몇 대사들과 함께 남게 됐다.

홍상수 감독과는 틈틈이 함께 작업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로 시작, '옥희의 영화' '다른 나라에서'에 이어 '우리선희'까지 왔다. 무려 두 편의 영화에서 제목에 이름을 건 주인공으로 분했다. '옥희의 영화'의 옥희, '우리선희'의 선희는 정유미를 통해 숨결을 얻은 캐릭터라는 점 외에, 한 두 마디의 말로는 설명 못할 매력의 인물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배우 정유미와 이선균의 '케미(Chemistry)'를 볼 수 있다는 점도 두 영화가 지닌 공통 분모다.

'우리선희'가 한창 관객을 만나고 있던 어느 가을 날, 서울 건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의 강의실에서 정유미를 만났다. '우리선희'와 '옥희의 영화' 촬영이 이뤄졌던 공간이다.

홍상수 감독과 몇 편의 영화를 함께 작업했던 만큼, 당일 아침 나오는 대본을 외워야 하는 것 외에 '우리선희' 현장에서 특별히 힘든 일은 없었단다. 정유미는 "선희가 대충 영화과 학생이라는 것 외엔 이 영화로 무슨 이야길 할 것인지도 듣지 못했다. 시놉시스도 본 적이 없다"고 큰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뜨며 입을 열었다.

"홍상수 감독님의 영화 현장은 다른 영화들과는 환경 자체가 약간은 다르니까… 대본은 아침에 나오고 그 날 그 분량을 찍어야 하잖아요. 물론 다른 현장도 그렇지만 내가 무엇을 해야 할 지 미리 알고 있는 거랑은 다르니까요. 무슨 연기를 하게 될 지 모르니까 일단은 흥미롭기도 해요. '오늘은 어떤 대사를 주실까' 궁금한 거죠. 얽매여 있지는 않으려고 해요. 이미 알고 온 거니까."

영화는 유학을 위해 대학 시절 교수에게 추천서를 받으러 캠퍼스를 다시 찾은 선희의 사연으로 시작된다. 추천서 탓에 선희와 다시 마주한 최교수(김상중 분), 영화 감독이 된 전 남자친구 문수(이선균 분), 과거 애매모호한 사이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선배 재학(정재영 분)은 저마다 선희에게 깊은 관심과 애정을, 그리고 종잡을 수 없는 호기심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선희의 마음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문수와 낮술을 하는 걸 보니 전 남자친구에 아직 미련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재학과 키스를 나누고 있으니 그에게 마음이 남은 듯도 싶다. 술 한 잔 함께 걸친 최교수와 다정히 손을 잡는 모습에선 묘한 분위기가 퍼진다.

세 남자의 사이에선 선희를 그리는 어휘들이 돌고 돈다. 내가 떠난 자리에서 나에 대해 나도는 이야기들이라니, 직접 확인할 수 없는 뒷담화에 호기심이 일 법도 하다. 정유미는 "실제 나라면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해하지 않을 것 같다"며 "자기 식대로, 자기가 사는 대로 이야기하지 않겠냐"고 답했다.

"여러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같은 이야기를 해도 이렇게 다들 뉘앙스가 다르구나' 생각하곤 해요. 인터뷰에서도 그렇고요. 영화 속 세 남자들에게 선희는 그런 사람인 것 같아요. 선희에 대한 말들도 그냥 느낌이죠. 어떤 것이 진짜 선희인지는 알 수 없잖아요. 꼭 그렇게 정의를 내려야 하는지, 살면서 그게 꼭 필요한지도 잘 모르겠고요."

극 중 세 남자들이 선희를 두고 하는 말들이란 한없이 일차원적이고 단편적이다. 선희를 향한 그들의 복잡한 마음을 담아내기엔 그야말로 얕고 단순한 어휘들일 뿐이다. "내성적이다" "용감하다" "안목 있다" "가끔 또라이같다"는 표현들이 세 남자와 선희의 관계를 부유한다. 인터뷰 중 정유미는 자신의 뒷편에 붙어 있던 '우리선희'의 포스터를 가리킨 채 웃으며 "영화에선 편집됐지만, 저 표정은 세 남자 때문에 '멘붕'에 빠진 선희의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어찌 보면 세 남자 모두에게 미안하긴 하네요. 선희 정말 대단하다.(웃음) 선희는 정말 '또라이'같기도 하고 용감하기도 해요. 저런 모습은 타고 나는 것 같아요. '옥희의 영화' 속 옥희나 '우리선희' 속 선희를 본 분들이 저도 그들 같을 것이라 생각하곤 해요. 선희에 대한 남자들의 이야기와 저를 비교해 보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저는 내성적이지는 않고 안목은 있어요. 아주 가끔 용감하고요. 선희가 조금 더 용감한 것 같아요. 머리가 좋은지는 모르겠어요.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안좋은 것 같기도 하고.(웃음)"

관객들이 정유미의 실제 모습을 옥희 혹은 선희 같은 것이라 생각하는 데엔 다 이유가 있다. 홍상수 감독 특유의 작업 스타일과 만나, 각 영화 속 정유미는 그 어떤 작품에서보다 인물 그 자체로 보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우리선희'의 초반부 문수와 치킨집에서 낮술을 하던 선희가 종업원을 향해 욕지거리를 읊는 장면, 중반부에 선희가 재학의 집 앞에서 그와 키스를 나눈 뒤 혼자 터덜 터덜 길을 걸어 내려가는 장면은 그 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을 법하다. 그런데 웬걸, 욕 이야기를 꺼내니 되려 "제가 정확히 무슨 대사로, 뭐라고 욕을 했었냐"며 되묻는다. 이번에도 눈동자는 토끼처럼 동그랗다.

"너무 바쁘게 찍었던 터라 기억이 안 나서 영화 보고 깜짝 놀랐어요. 현장에서 아침부터 대사 외우고, 다음 현장 전까지 대본을 들고 있어야 하니까 어떤 디테일을 했는지 전혀 기억이 없거든요. '아, 맞다. 저런 장면이 있었지' 싶어서 저도 웃긴 거에요.(웃음) 모든 게 그런 편이에요. 보고 나서 '아, 저 때 (선균) 오빠 좀 고생 시켰지' 생각이 나요. 내가 떠올리려고 하면 잘 안 나던 기억이 영화를 보면 나고. 물론 '키스신을 했다'는 기억은 나요. 어떻게인진 몰라도 '찍었지' 하는 기억은 있죠."

재학과 키스하고 가벼운 말을 몇 마디 주고 받은 선희가 그와 헤어져 홀로 길을 걸어가는 장면은 정유미에게도 크게 마음에 드는 신이었다.

"그 걷는 장면을 좋아해요. 쓸쓸해 보이기도 하고. 진짜 비가 좀 와 있었고 길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걸으며 허밍을 했다더라고요. 감독님이 그게 들려서 살렸다고 하셨어요. 처음부터 들리는 건 아닌데, 들으려고 노력하다 보면 어느 순간 들릴 거에요.(웃음)"

세 남자와 선희 사이에선 꼭 선희에 대한 어휘들 말고, 삶과 꿈을 향한 자세에 대한 말들도 아포리즘처럼 돌고 돈다. 최교수의 입에서 시작해 재학과 문수, 선희의 입에서도 흐르게 되는 "끝까지 파 보라"는 대사가 그 중 하나다. 영화의 막바지, 선희는 영화 만들기를 끝까지 파 보겠다고 다짐한다. 배우 정유미에겐 연기가 그런 대상일 터다.

"끝까지 파 보려고 했을 때, 한계는 늘 있죠. 재미도 있고요. 잘 할 때도 있지만 못할 때도 있고. 그걸 다 티 내진 않지만요. 현장에 가면 계획된 스케줄에 어떻게든 해야 하는 게 있잖아요. 어떨 땐 무리 없이 해 내고, 어떨 땐 컨디션이 안좋아도 해야만 하는 상황이 오죠. '한계'라는 말과는 다를 수 있지만 어딘가에 부딪힐 때가 있어요. 그런데도 해야 하고 싸워야 하고. 선택한 거니까, 책임져야 하니까요. 그 안에서 사람들이 바라는, 혹은 보여줄 수 있는 걸 표현해야 하죠. 매일 잘 되진 않아도 극복해야 하는데, 그걸 막 어렵게 생각하지는 않아요."

영화 인터뷰로 만나 종영한 드라마 이야기를 하기도, 저도 모르게 서로의 연애사를 늘어놓기도 하는 것이 바로 통상적인 인터뷰의 풍경이다. 그런데 정유미와 대화를 나눈 한 시간은 '우리선희'의 이야기로 가득 채우고도 부족했다.

단지 인터뷰가 이 영화의 개봉을 맞아 이뤄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유미는 분명 선희를 3인칭으로 칭하는데도, 자꾸만 그가 영화 속 선희로만 보였다. 덕분에 인터뷰는 별다른 노력 없이도 본 의도에 충실하게 맞아 떨어지게 진행됐다. 물론 말수가 적을 것이란 예상과 달리 차분하게 할 말을 다 털어놔준 인터뷰이라 가능했던 일이다.

대화를 마무리하던 마지막 말마저 영화 속 선희의 자기고백처럼 들려왔다. 인터뷰를 풀어내며, 마치 최교수가 돼 선희의 추천서를 쓰는 기분도 들었다.

"생각보다 말을 잘 한다고요? 인터뷰를 하기로 했으니 잘 해야죠. 공개적인 자리에선 '말이 날아다닌다'는 생각에 조심스러워하는 편이었어요. 그래도 지금은 옛날보단 나아진 거예요. 아, 전에도 둘이 만날 땐 이야기 잘 했어요!(웃음)"

'우리선희'는 지난 12일 개봉해 전국 극장에서 상영 중이다. 러닝타임은 89분, 청소년관람불가.

조이뉴스24 권혜림기자 lima@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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