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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마녀', 태어나는가 길러지는가


여성 주연 영화, 그 안팎의 흥미로운 지점들

[조이뉴스24 권혜림 기자]

(기사 본문에는 영화의 결말에 대한 내용이 일부 포함돼 있습니다.)

자윤(김다미 분)은 시골 농장의 전원주택에서 선량한 중년 부부의 보살핌 아래 자랐다. 부부는 집 앞에 쓰러져 있던 어린 소녀 자윤을 친딸처럼 살뜰히 키웠다. 지극한 사랑 속에서 자윤은 기억을 잃어가는 어머니를, 그리고 떨어지는 소값과 밀린 사료값을 걱정하는 사려깊은 딸로 성장했다. 자윤은 모든 방면에서 뛰어난 학생이기도 하다. 외국어부터 미술까지, 벽을 가득 채운 상장의 타이틀이 다채롭다. 친구 명희(고민시 분)가 가수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가라며 등을 떠미는 것을 보니 노래 실력까지 출중한 것이 분명하다.

상금으로 집안 형편에 보탬이 되고 싶었던 자윤은 명희의 제안을 받아들여 오디션에 참가하기로 한다. 그런데 이 여정이 심상치 않다. 서울로 가는 기차에서부터 정체 모를 남성이 다가와 기분 나쁜 미소를 짓고, 손을 올리며,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다.

첫 오디션에 합격해 방송에 출연한 이후 이상한 방문은 더욱 잦아진다. 마치 그의 실존을 확인하길 나란히 기다려온듯, 불청객들은 자윤의 조용한 일상을 방해하기 시작한다. 자윤은 의아함을 느낀다. 그리고 머리가 깨질듯한 고통 속에서 조각난 기억들을 맞춰나간다. 부모에게까지 위협이 닥치자 그는 분노하고, 깨어난 본능을 마주한다.

'마녀'(감독 박훈정, 제작 영화사금월)의 시놉시스에 제시된 정보는 제한적이다. 자윤이 수많은 이들이 죽은 한 시설의 사고 현장에서 홀로 탈출했다는 것, 그날 이후 모든 기억을 잃고 살아오다 의문의 인물들을 맞닥뜨린다는 사실까지다.

전반부가 이에 해당한다. 주인공 자윤의 평화롭던 일상이 서서히 붕괴되는 과정, 기억을 자극하는 외부의 인물들을 통해 자윤이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게 되는 순간을 쫓는다. 이후 곳곳에 흩뿌려져 있던 단서들이 조합되며 관객은 자윤의 시선에서 제3자의 눈으로 이야기를 관망하게 된다. 모든 의심의 띠를 팽팽히 쥐고 흔드는 자윤의 시각과 그 바깥의 개입 사이에서 영화와 관객의 정보전이 시작된다.

'마녀'는 유전자 조작을 통해 완벽한 살인 병기로 태어났지만 의지를 가진 인간으로 성장한 주인공이 삶의 명분을 어떻게 뒤흔드는지를 그리는 영화다. 이 과정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선 혹은 악의 얼굴이 '태어나는가, 아니면 길러지는가'에 대한 감독의 천착이다. 어린 자윤은 시설에서 탈출한뒤 선량한 인물들과의 관계를 통해 인간성을 회복해나간다. 하지만 그의 안에서 쉽게 제거될 수 없는 파괴와 공격의 본능은 학습된 인간성과 충돌을 일으킨다. 이는 곧 자윤이라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구성하는 토대가 된다.

운명과 환경의 사이에서 조응과 마찰을 이어가는 주인공의 모습은 영화가 택한 성별 재현의 방식과 만나 미덕을 낳는다. 자윤은 물론이고, 미스터리의 키를 쥔 여성 인물 닥터백(조민수 분), 또 다른 살인 병기 긴머리(다은 분)에게서도 '여성성'으로 분류돼 온 행동이나 사고의 양식은 관찰되지 않는다. 그간 여성 주연 액션물들이 갈등을 봉합하는 방식으로 모성애나 관용의 정서를 차용했던 것과 비교하면 분명한 차별점이다.

성별 이데올로기의 차원에서 감독의 전작 '브이아이피'와 신작 '마녀'가 이루는 비연속성도 흥미롭다. '브이아이피'는 개봉 당시 여성 캐릭터를 재현하는 폭력적 시선으로 거센 비판에 직면했던 영화다. '마녀'의 전복성이 끝내 진일보한 여성성을 구현하지 못하고 기계적 실험의 단계에 머물렀다는 평이 감독론의 관점에서 일리있게 다가오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다.

한 인간을 완성하는 최종 심급이 본성이냐 학습이냐에 대한 논쟁만큼, '마녀'의 시도를 과연 감독의 타임라인 밖에서 온당하게 해석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은 유의미하다. 비현실에 기댄 설정으로 캐릭터로부터 성별을 지워내는 일이 여성 영화의 성취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성찰해볼 만하다.

그럼에도 발견할 수 있는 희망은 '마녀'라는 텍스트가 제시하는 논쟁 구도의 진보에 있다. 영화를 비평하며 '이름이 있는 두 명 이상의 여성 인물이 등장하는지' '남성이 아닌 다른 소재에 대해 이들이 대화하는지'(이상 벡델테스트의 기준)와 같은 최소 조건을 논하진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답습과 퇴보만은 피한 결과물이다. 물론 이런 평가는 단 한 순간도 성애화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능력으로 욕망에 집중하는 여성 캐릭터가 얼마나 희소했는지를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마녀'는 지난 6월27일 개봉해 상영 중이다.

조이뉴스24 권혜림기자 lima@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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