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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 이창동, 영화라는 헛간을 채우다(일문일답)


"영화, 비닐하우스 같은 매체…비어버리면 아무것도 아냐"

[조이뉴스24 권혜림 기자] 영화 '버닝'으로 칸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이창동 감독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알렸다. 무수한 은유로 점철된 이 영화의 의미를 재구성해나가는 것은 결국 관객의 몫임을 알리면서도, 이 시대 청년들의 말해지지 않는 분노에 대한 관심이 영화의 출발이었다고 설명했다. 한국 뿐 아니라 세계 영화계가 주목해 온 거장 이창동의 귀환은 지금 이 시대, 오늘의 세계와 조응하기 위한 부지런한 노력 끝에 이뤄졌다. 그리고 그의 작업기는 결국 헛간처럼 비어있는 영화의 바탕을 자신의 세계로 채워나간 과정이기도 했다.

18일(이하 현지시각) 제71회 칸국제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프랑스 칸의 해변 모처에서 경쟁부문 초청작 '버닝'(감독 이창동, 제작 파인하우스필름, 나우필름)의 이창동 감독과 배우 유아인, 스티븐연, 전종서가 참석한 가운데 라운드 인터뷰가 진행됐다.

'버닝'은 유통회사 알바생 종수(유아인 분)가 어릴 적 동네 친구 해미(전종서 분)를 만나고, 그녀에게 정체불명의 남자 벤(스티븐 연 분)을 소개 받으면서 벌어지는 비밀스럽고도 강렬한 이야기. 일본의 유명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 '헛간을 태우다'에서 모티프를 얻은 작품이다.

세계 영화계가 주목해 온 작가주의 감독인 그는 신작을 통해 뚜렷한 대상이나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이 시대 청년들의 분노에 주목했다. 국가와 사회, 종교나 신념 등을 초월해 동세대들로부터 관찰되는 이 분노의 정서가 '버닝' 속 인물들에 반영됐다. 영화가 나열하는 무수한 은유의 원관념은 감독이나 배우의 입을 통해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대사나 공간을 통해 툭툭 던져지는 메타포는 사건 전후 인물의 행동이나 장면의 배열을 어떻게 수용하는지에 따라 다른 이야기를 내뱉는다.

이창동 감독은 영화 속 모호한 지점들에 대해 "분명한 것이 없다. 그런 의심들을 통해 (관객이) 다른 질문에 연결되길 바랐다"고 알렸다. 극 중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 비닐하우스를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비유하며, 비어있는 어떤 공간이 의미를 얻게 되는 상호작용의 과정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우리가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으며 세상을 이야기로 이해하기도 하고, 신문으로는 더 직접적인 논리로도 이해하게 되겠지만, 예술이라는 건 일종의 메타포를 통해 세상과 삶을 이해하고자 하는 도구예요. 우리가 받아들이는 인식에 서로 다른 것들이 있을 수 있는 것 같아요. 이를테면 (영화에도 등장하는) 윌리엄 포크너와 같은 문학을 하는 것이 문학의 궁극적 자세라 생각할 때도 있었어요. 포크너는 그 나름의 진지함으로, (원작의) 하루키는 다른 방식으로 삶에 대해 이야기하죠. 서로 다른 예술 방식을 가지고 있는 셈이에요."

감독은 '버닝'을 통해 궁극적으로 영화의 속성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할 계기를 마련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는 "사람들은 영화를 보며 많은 것을 느끼기도, 현실에서 이탈하기도, 그 영화에 대한 태도로 서로 싸우기도 하지만 사실 영화라는 매체는 비어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원작 단편에선 헛간으로, 영화에선 비닐하우스로 비유했을만한 그 '비어있음'이 영화의 바탕이라고 말했다.

"마치 비닐하우스처럼, 뭔가 형상이 있는 것 같긴 하지만 투명할 뿐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농사를 지으면 그 안에 내용물이 담기겠지만, 비어버리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죠. 영화 매체도 그런 것이 아닌가 싶어요. '버닝'을 통해 나름의 미스터리 이야기를 어떤 메시지로 전달하기보다는 보여주고 싶었어요. 관객은 그것을 몰라도 상관 없어요. 표면의 미스터리만 따라가면서 텐션을 느끼기만 해도 되죠."

이창동 감독은 '버닝'으로 다섯 번째 칸에 초청됐다. '박하사탕'이 제53회 영화제의 감독주간에 초청됐고 '초록물고기'는 비평가주간의 러브콜을 받았다. 지난 2007년 경쟁부문 초청작 '밀양'으로는 전도연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겼다. 2010년에는 '시'로 각본상을 수상했으며 2011년에는 비평가주간 심사위원장으로 영화제를 누비기도 했다.

올해 시상식에선 본상 수상에는 고배를 마셨지만 국제영화비평가협회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입증했다. '버닝'의 신점희 미술감독은 칸국제영화제 공식초청작 중 미술, 음향, 촬영 등 부문에서 가장 뛰어난 기술적인 성취를 보여준 작품의 아티스트를 선정해서 수여하는 벌칸상(The Vulcan Award of the Technical Artist)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한국 영화인의 벌칸상 수상은 지난 2016년 칸 초청작 '아가씨'의 류성희 미술감독 이후 두 번째다.

한편 '버닝'은 지난 17일 개봉해 국내 관객을 만나고 있다.

이하 이창동 감독과 일문일답

-감독이 중심으로 삼는 것이 개인인지 혹은 사회 속의 개인인지를 생각할 때 '버닝'은 '밀양'이나 '오아시스' '시' 보다는 '박하사탕'과 그 결을 같이 하는 것 같다. '박하사탕'은 비교적 초기작에 속하는데, 다시 초기의 시선으로 돌아간 이유가 궁금하다.

"이야기하는 법, 내가 세상이나 삶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다. 10년, 20년이 지난다 해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그러니까 영화를 단순한 감각으로 받아들이기 바랐다. 그래서 영화가 미스터리, 혹은 스릴러의 형태를 띤 것 같기도 하다. 그냥 영화를 느끼기만 했으면 좋겠다. 사실은 그만큼 달라졌다. 과거에도 나는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영화를 만들진 않았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그냥 질문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질문하는 방식이 달라졌다고 할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 '헛간을 태우다'는 영화보다도 훨씬 더 모호한데, 이 원작에 매료된 이유가 궁금하다.

"원작 플롯은 밑도 끝도 없는, 그러나 약간 미스터리한 짧은 이야기다. 그것을 내가 이전에 생각했던, 다음 영화를 준비하며 생각한 것과 연결시킬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설명하기는 싫지만 기본적으로 단순한 것만 이야기하자면, 요즘 세상의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그대로 있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이랄까? 몇십년 전만 해도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나 세상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태도가 분명했다. 뭔가 잘못돼서, 그것만 어떻게 하면 세상이 좋아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지금은 그게 없어진 것 같다. 그것을 아직 붙들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보편적으로 이것이 문제다'라고 생각할만한 대상이 없어진 것 같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각각 문제를 안고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이 달라진 상황에서 (원작의) 이 짧은 미스터리를 확장해 간달까? 혹은 다른 여러 미스터리를 통해 간달까? 그 다음에, 그걸 넘어서 삶의 방식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영화에는 벤과 종수가 나오지만 두 인물이 각각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살고 있다. 벤은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윤택하게 좋은 것을 누리며 살고 있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관용적이고 남들을 배려하는 것 같다. 별 문제가 없어보인다. 대개 종수같은 친구가 선망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다. 우리 모두 그런 삶을 꿈꾸는지도 모른다. 삶의 방식 자체가 그쪽으로 가고 있기도 하다. 종수는 아직도 현실의 조건에서 못 빠져 나오고 있다. 여전히 그런 젊은 친구들이 많다. 설사 부모가 조금 여유있는 부모라 해도 자식은 종수같은 삶을 사는 집도 많더라. 그런 둘의 삶의 방식의 태도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그 관계 또한 미스터리한 코드로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영화는 모호한 관계와 흐름을 이어가지만 관객으로서는 영화가 쌓아가는 단서들을 학습하며 극에 끌려가게 되는 것 같다. 치밀하게 계획한 결과인지 궁금하다.

"시나리오 단계에서도 그렇게 조율이 돼 있었다. 그런데 그건 시나리오 단계에서 머릿속에서 상상하는 것이고, 직접적으로 그걸 얼만큼 체화해 보여줘야 하는지 촬영 중에도 조절해야 했다. 벤이라는 인물 자체는 미스터리 그 자체다. 벤은 어찌보면 착하고 선의 가득한 인물로 보이기도 하고 어찌보면 의심스러우면서 뭔가 가지고 있는듯 보이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분명해지면 안되니까 적절히 조절해야 했다. 이를테면 표정이든 말하는 목소리 톤이든 그것을 조절해나가는게 중요했다.

'학습'은 다른 말로는 정보를 주는 것인데, 정확한 정보를 주지 않으니 제대로 된 학습이라고는 볼 수 없다. 학생을 가르치듯 하는 것은 아니다. 정보를 적절히는 주는데, 정보의 양에 따라, 그걸 받아들이는 이들에 따라 다르겠지만 미묘한 조절이 필요했다."

-'버닝'은 그간 감독이 선보였던 영화들과 비교해 가장 감각적인 영화다. 이런 변화가 일어난 배경이 궁금하다.

"어떤 외적 과정을 거쳐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는 설명하기 힘들다. 지금은 어쨌든 감각이나 정서로 소통하는 시대인 것 같다. 그렇게밖에 말할 수가 없다. '이런 시대니까 이런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라기 보다는 내 나름대로 영화라는 것에 대해 자꾸 생각하다보니 이런 식의 영화 방식을 해보고 싶었다고 할까?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면 전에는 영화 모든 요소를 내가 통제하고 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하고 싶었다. 영화 속 모든 요소들, 인물이든 소리든 영상이든 음악이든 각각 각자 알아서 존재하는데 자유롭게 그것들이 어떤 나름의 통제되지 않는 우연한 질서처럼 있는 그런 것을 꿈꿨다. 실제로 그렇게 되기는 거의 불가능하겠지만 어쨌든 최대한 그렇게 해보자는 자세로 영화를 만들었다."

-통제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영화를 하는 사람으로서 근원적 질문이다. 사실 영화라는 게 모든 것을 정해놓고 통제해서 만들어내는 세계라고는 생각하기 쉽지 않다. 마치 감독이 신의 흉내를 낸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 곳이 파주든 어디든 삶의 모습을 우연히 포착해 낼 수 있는 것과 만들어 보여지는 것은 많이 다르지 않나. 내가 창조하지 않고 잡아만 내겠다고 생각하는 것과 일일이 통제하는 건 다르다. 사실 이게 굉장히 모순적인 이야기인데, 그 둘은 항상 같이 있는 것이다. 영화를 만드는 방식에 있어서는 그렇다. 어찌됐든 내가 조금 덜 통제하고 비켜 서 있는 것이 영화라는 매체에 더 맞는다고 생각하게 됐다. 사실 이런 것까지 관객에게 알리거나 이게 더 가치있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그저 내 자신이 그렇게 됐다."

-연기 연출 방식 역시 달라졌나?

"배우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내가 원하는 대로 끌고 오진 않는다. 이번엔 특히 배우의 자발성을 최대한 끌어내려 했다. 스태프들과의 작업도 비슷하데, 점점 나이가 들면 내가 노력하지 않으면 자유로움을 추구하기 어려워진다. 크게 달라졌다기보다 더 노력하게 된 것 같다. 예를 들면 전에는 영화에서 음악을 많이 절제하는 편이었다. 음악은 영화 속 세계에 인위적으로 들어가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굳이 그것까지 고집할 것 있나 생각한다."

-한국에서도 '버닝' 속 이야기를 둘러싼 다양한 해석들이 나오고 있다. 영화의 종수가 소설을 쓰는 장면이나, 사건 후 종수가 꿈에서 깨어나는듯한 장면들은 영화의 해석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데, 이 역시 의도한 것인가?

"그렇다.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 것을 굳이 의도했는지는 모르지만 이런 방식으로 영화를 찍으면 그렇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것 같다. 종수는 작가도 아니고 작가 지망생이다. 그것이 종수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태도에 조금 근원적인 뭔가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작가가 아무 생각없이 세상을 바라볼 수는 없으니까.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지? 내 눈앞의 세계, 현실은 뭐지?'라고 질문하게 된다. 관객이 종수의 감정에 기댄다면 조금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그 점은 분명히 의도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종수는 대체 무슨 글을 쓸까?' 생각하게 된다. 극에도 그런 대사가 나오지 않나. 그게 모든 지망생이 하는 질문이다. 나도 했고, 지금도 한다. 어쩌면 감독으로서 나의 한계 혹은 비극인지도 모르겠다. '그냥 재밌는 영화 만들면 되지 뭘 질문을 하고 있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러다보니 8년의 시간이 갔다. 그런데 적어도 작가라면, 그 질문을 버리는 순간, 혹은 하지 않는 순간 작가가 아니게 된다. 그래서 종수에겐 무슨 글을 쓸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있다.

-모호한 장면과 연결들에 대해선 배우들 역시 모호하게만 아는 채로 연기를 했나?

"그건 아니다. 사실 사람은 잘 모를 수 있다. 연쇄살인범이라 해도 직접 사람을 죽여야만 살인범인 것이 아니다.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 수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멀리 있는 사람을 죽이는 데는 죄의식이 없다. 멀리 형상으로 보이는 것이 아닌, 숫자로 돼 있다면 아무 죄의식이 없다. 그렇게 치면 거기서 자유롭게 비켜나 있을 사람이 별로 없다. 우리 삶 방식 자체도 그렇다. 종수가 작가로서 그의 삶이나 해미의 삶에 대해, 그 구원에 대해 얼만큼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버닝'의 어떤 한 장면을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면, 그건 무슨 장면일까?

"몇몇 장면은 '이걸 영화로 만들어 볼 수 있겠다'는 동기가 되기는 했다. 그 중 하나는 해미가 춤추는 장면이었다. 그것에 영화 속 모든 것이 어느 정도 집약돼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지로든, 무엇으로든 그렇다고 생각한다."

조이뉴스24 칸(프랑스)=권혜림기자 lima@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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