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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준의 이런 야구]장기영과 재일교포 학생 야구단②


한국야구 발전의 견인차…'한국인 자긍심' 고취 계기도

한국야구의 역사를 논할 때 '백상' 장기영은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언론인이자 체육인, 그리고 경제관료로서 한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그는 한국야구가 오늘날의 반열에 오르는데도 크게 공헌했다.

야구사에 미친 그의 여러 업적 중 주목할 부분이 재일교포 학생야구단 초청 경기다. 재일교포 야구단의 결성과정과 이들을 초청하게 된 배경 등을 2회에 걸쳐 연재한다.

조희준 한국프로스포츠협회 전문위원은 최근 한양대학교대학원 글로벌스포츠산업학과에서 '한국야구발전에 기여한 백상 장기영 연구'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 위원의 논문에서 일부를 발췌·편집했다. (편집자 주)

<①편에 이어>

◆험난한 고국행

도쿄에 모인 재일교포 선수단은 후쿠오카까지 열차편으로 이동했다. 요즘은 고속철도로 6시간이면 도착하지만 당시에는 하루 종일 걸렸다. 여기에 후쿠오카에서 부산까지 이동하는 길도 고역이었다. 당시 일본에서 한국으로 이동하는 교통편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장기영은 해운공사(현 한진해운)의 도움을 얻어 교포선수단이 탈 배를 마련했으나 엔진 고장 등으로 선수단은 예정보다 이틀 늦게 부산에 도착한다. 그는 사고를 통해 일정 변경 사실을 알리는 한편 경무대 예방 및 논산훈련소 입소 등의 행사일정도 꼼꼼하게 점검했다.

대회를 무사히 마치기까지 난제가 산적했다. 요즘도 일본 거주 외국인은 재입국비자를 취득해야 일본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만큼 일본의 외국인 대상 행정절차는 무척 까다롭다. 국교가 수립되지 않은 당시 상황에서 재입국비자 발급은 말도 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장기영은 어려운 행정절차를 불굴의 의지로 해결했고, 수정된 경기일정에도 불구하고 행사를 무사히 치러내는 뚝심을 발휘했다.

재일교포 선수단의 방한에 한국 야구계의 기대는 무척 컸다. 당시 이신득(李辛得) 대한야구협회 이사장은 "한국전쟁으로 정체된 한국야구가 다시 숨을 몰아쉬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야구계는 재일교포 학생야구단의 방한을 고대하고 있다"는 내용의 환영문을 1956년 8월2일 신문에 기고했다. 그는 '경기 내용보다도 이들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바른 인식을 가지기를 기대하며 이들이 논산훈련소에 입소해서 병역의무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경기 출전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는 뜻도 나타냈다.

주최측은 대회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교포팀과 대전할 한국 고교팀들을 자세히 소개했다. 1956년 8월3일부터 국내 주요팀들의 전력과 현황을 차례로 연재했다. 기획물의 첫 대상인 인천 동산고에 대해서는 '교포(僑胞)팀과 대전(對戰)할 국내(國內)팀의 푸(프)로필 동산고교편(東山高校編) 승리(勝利)의 기록(記錄)도 빛나…공격(攻擊)보다도 수비(守備)에 더욱 능숙(能熟)'이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했다. 사상 처음 한국을 찾는 재일교포팀과의 특별 이벤트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려는 전략이었다.

◆'19세의 강타자' 장훈

어려움을 극복하고 생전 처음 조국에 도착, 1개월 남짓 체류한 선수들은 저마다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영원한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일본에서와 달리 '한국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새롭게 확립했다. 특히 '못살고 가난한 나라'로만 여겼던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크게 바꾸게 된 계기였다. 이들은 모국방문 일정을 마친 뒤 한결같이 "일본에서 듣기에는 조국이 전쟁으로 폐허가 된 것으로만 알았는데, 막상 와서 보니 훌륭하게 복구가 돼 있었다. 깜짝 놀랐다"며 "일본에 돌아가면 조국의 부흥된 모습을 그대로 전하겠다"고 들떠서 말했다.

첫 대회가 성공작으로 판명나자 이듬해인 1957년 2회 대회가 열렸다. 8월10∼9월5일 열린 모국방문경기에서 특이할 사항은 교포 투수 배수찬(본적 경북 성주군·에바라고 3학년)의 활약이었다. 배수찬은 교포팀이 치른 16경기 중 11경기에 등판하며 놀라운 스태미너와 기량을 과시했다. 배수찬은 원래 에바라고 야구부의 외야수였지만 교포팀에선 투수로 나섰는데, 낙차 큰 변화구로 큰 화제를 모았다.

왼손투수인 그가 던지는 외곽에서 내곽으로 크게 휘어지는 공에 한국 고교타자들은 꼼짝하지 못했다. 당시 힘으로만 윽박지를 줄 알던 국내 투수들에 비해 배수찬의 피칭은 '과학적인 투구'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 대회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배수찬은 1959년 제3회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에 한국대표로 발탁된다. 1960년에는 영구귀국하면서 교통부, 기업은행 등에서 명 외야수이자 강타자로 이름을 크게 날렸다.

195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10주년을 기념해 재일교포 학생야구단의 모국방문은 계속됐다. 내야수 오두수와 외야수 김현대는 2년 연속 교포팀에 포함됐다. 투수 현성호는 1959년 제3회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에 한국대표로 출전했고, 박정일은 귀국해 조선맥주, 한일은행 등에서 유격수로 활약했다.

세 번째를 맞는 1958년 선발팀엔 주목할 인물이 한 명 있었다. 훗날 일본 프로야구에서 통산 최다 3천85안타를 친 '타격의 신' 장훈(張勳)이었다. 장훈은 방한 후 첫 연습에서부터 놀랄 만한 타격능력을 선보인다. 당시 그의 활약상은 1958년 8월 13일자 한국일보에서 확인할 수 있다. '4타 중에 홈런 3개, 19세의 타격왕 장훈군'이라는 제목의 인물기사는 그의 연습장면과 성장과정을 비교적 상세히 담고 있다.

◆한국야구 발전의 도약대

재일교포팀의 방한은 한국 야구의 장비 선진화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들은 입국 당시 갖고 온 공, 배트, 글러브 등을 기증하고 돌아갔는데, 장비 부족으로 허덕이던 한국 야구계에 큰 도움이 됐다. 한국전력 투수 출신 이충순(전 OB베어스 투수코치)은 "당시 한국의 야구장비는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것에 의존하고 있었다. 양적으로 크게 부족했고, 당시 한국인의 체형에 맞지도 않았다"며 "열악한 환경에서 열심히 기량을 갈고 닦던 우리 고교투수들에게 재일교포팀이 가져온 일본제 장비는 보물이나 다름 없었다"고 말한다.

1960년 '제5회 재일교포 학생야구단'은 서울, 인천, 청주, 부산, 대구, 대전 등지에서 모두 16경기를 치러 13승 2무 1패의 전적을 남겼다. '재일교포 학생야구단 모국방문 친선경기'는 1965년까지 10년 동안 이어졌지만 1966년과 1967년은 경비문제로 주최측이 초청을 하지 못한 탓에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장기영은 1968년부터 교포선수단 초청 사업을 재개한다. 이번에는 '재일교포 학생야구단 모국방문 환영야구대회'로 명칭을 바꿔 대회를 진행했다. 이 해의 교포팀은 16전 5승 6무 5패로 역대 가장 저조한 성적에 그쳤다.

1971년 한 차례 더 쉬어간 재일교포팀은 1972년 '제2회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참가했으며 1973년에는 8월 20∼21일 이틀간의 공식 경기 만을 치렀다. '제4회 봉황기대회가 열린 1974년부터는 꾸준히 이 대회에 출전했고. 1997년까지 한국을 찾아 우리 야구인과 팬들에게 많은 것을 남겼다. 의미깊은 이들의 한국 방문 경기는 아쉽게도 1998년부터 중단된 상태다. 요즘은 재일동포 선수단을 기억하는 사람의 수도 크게 줄어든 느낌이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한국고교야구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프로야구 출범 이전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고교야구 붐의 밑바탕에는 재일교포 학생야구단 모국방문 경기가 단단하게 자리하고 있다. 고교야구의 인기를 그대로 승계한 프로야구도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재일교포 선발팀과의 교류전이 도약의 계기가 된 셈이다.

◆'잊혀져선 안될 이름' 장기영

재일교포 학생야구단은 1950년대 우리 고교야구의 발전에 기술적·이론적으로 크게 공헌했다. 교포선수들도 모국방문을 통해 한국인의 자긍심을 가지는 동시에 양국의 문화적 차이를 이해할 수 있었다. 장기영은 한·일 국교정상화 이전 자사 홍보와 일본 거주 동포 학생들을 위해 야구를 통한 '문화 교류 이벤트'를 추진했고, 결국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정확히 60년 전 그가 엄청난 난관을 무릅쓰고 추진한 행사가 국내야구의 비약적 발전을 이루어내는데 큰 도약대 역할을 한 셈이다. 장기영은 여러모로 한국 야구사에서 절대 잊혀져선 안 될 인물이다.

<끝>

조희준

조희준은 20년 이상 한국야구위원회(KBO)에서 야구행정을 다루며 프로야구의 성장과정을 직접 지켜봤다. 국제관계 전문가로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출범 당시 한국 측 협상단 대표로 산파 역할을 맡았다. ▲일본 호세이(法政)대학 문학부 출신으로 일본 야구에 조예가 깊은 그는 ▲KBO 운영부장 및 국제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프로스포츠협회 전문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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