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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8년]좌절과 환희의 월드컵 8회 진출사②치욕의 프랑스에서 새 역사의 남아공까지


[이성필기자] 창간 '8'주년을 맞이한 조이뉴스24가 한국 축구의 월드컵 본선 '8'회 진출 역사를 다시 되돌아봅니다. 좌절과 환희의 순간들을 되짚어보면서 통산 9회째 및 8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을 기원하고자 하는 뜻입니다.

◆1998 프랑스월드컵

1996년 6월, 2002 월드컵이 한일 공동개최로 결정되면서 월드컵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더욱 커졌다. 1998 프랑스월드컵 아시아 예선이 시작된 뒤 열기는 폭발했다. 1980년대 독일 분데스리가를 호령했던 차범근 감독이 대표팀 지휘봉을 잡으면서 스포트라이트는 그에 달했다.

1차 예선을 3승1무(9득점 1실점)로 통과한 한국은 최종예선에서 일본,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아랍에미리트연합(UAE)과 한 조에 속했다. 일본을 반드시 넘어야 하는 숙제를 받은 한국은 도쿄 원정에서 이민성의 왼발 결승골로 2-1로 이기며 4연승을 내달렸다. '도쿄대첩'이 완성된 순간이었다. 홈에서 패하기는 했지만 본선행은 문제없었다.

정작 문제는 본선이었다. 멕시코와 1차전에서 하석주의 선제 프리킥골로 앞서갔지만 무리한 백태클로 퇴장당하면서 혼란에 빠져 1-3으로 패했다. 네덜란드와 2차전에서는 거스 히딩크 네덜란드 감독의 여우 전술에 손발을 다 내줬고 0-5로 대패했다.

차범근 감독은 이 경기 뒤 당시 조중연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현 대한축구협회 회장)의 칼날을 피하지 못하고 경질됐다. 대회 도중 지도력에 공백이 생겼음에도 한국은 벨기에와 최종전에서 1-1로 비기며 그나마 유종의 미를 거뒀다.

한국은 프랑스월드컵을 통해 대표팀을 관리하는 수뇌부의 중심잡기가 얼마나 필요한지 절감했다. 무리한 결정으로 팀 분위기는 경직됐고 한동안 차 감독은 축구협회를 멀리했다. 지난 2009년에서야 조 회장이 차 감독에게 화해의 악수를 청하며 오랜 갈등을 정리했다.

◆2002 한일월드컵

'오대영'이 '신화'라는 단어로 뒤바뀐 기적의 월드컵이었다. 일본과 월드컵 공동 개최국 자격으로 본선 자동진출권을 얻은 한국은 프랑스 월드컵에서 굴욕을 안겨다줬던 거스 히딩크 감독을 영입하며 안방에서 16강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드러냈다.

히딩크 감독은 "한국 선수들은 기술이 좋지만 체력이 약하다"라며 체력 강화 훈련인 파워프로그램을 도입했다. 기술보다 체력이 더 좋은 것으로 알고 있던 국내 축구인들로서는 당황이 되는 진단이었다. 히딩크는 선수들의 이름값을 배제하고 실력 위주의 선발로 대표팀 경쟁력을 끌어올렸다.

히딩크의 의도는 초반 혼선을 빚는 듯했다. 각종 평가전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2001 컨페더레이션스컵 프랑스전 0-5, 같은 해 8월 체코와 평가전 0-5 대패로 본선 전망은 밝지 않았고 부정적 여론이 형성됐다. 하지만, 심지를 굽히지 않은 히딩크는 서서히 팀을 단단하게 만들며 신화 창조를 준비했다.

본선 폴란드와 첫 경기 2-0 승리를 시작으로 한국은 미국(1-1), 포르투갈(1-0)까지 조 예선에서 무패를 기록하며 16강 진출을 이뤄냈다.

16강에 만족하지 않은 히딩크 감독은 "아직 배가 고프다"라며 선수들의 승리욕을 자극했고 16강 이탈리아(2-1), 8강 스페인(5 PK 3) 등 세계의 강호들을 연파하며 온 세계를 놀라게 했다. 준결승에서 독일에 0-1로 패했지만 이미 4강 신화는 완성돼 있었다.

'오대영 감독'이었던 히딩크에게는 '희동구'라는 명예로운 한국 이름까지 생겼다. 심지어는 당시 대선 바람에 편승해 '히딩크를 대통령으로'라는 구호까지 나올 정도였다. 학연, 지연 등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실력이라는 객관적인 잣대로 하나의 팀을 만든 히딩크의 지도력과 혼신의 힘을 다한 태극전사와 붉은 악마의 위력을 확인한 대회였다.

◆2006 독일월드컵

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화란 훈장을 달고 박지성(현 퀸즈 파크 레인저스)과 이영표(현 밴쿠버 화이트캡스)는 히딩크 감독의 부름을 받아 네덜란드 PSV에인트호벤에 입단했다. 이 외에도 김남일, 이천수, 송종국, 이을용 등도 유럽 무대로 나갔다.

선진 축구리그를 경험하는 선수들이 속속 나오면서 당연히 4년 뒤에는 첫 원정 월드컵 16강 진출이라는 기대감이 커졌다. 움베르토 코엘류 감독을 영입해 시동을 걸었지만 2차 예선에서 최약체 몰디브와 0-0으로 비기는 충격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코엘류 감독이 경질된 뒤 지휘봉을 잡은 요하네스 본프레레 감독은 본선행을 확정했지만 경기력 자체는 인상적이지 않았다. 한국은 3승1무2패(9득점 5실점)로 최종예선을 통과했다.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에 2패를 기록하는 등 본선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본프레레 역시 경질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이 때부터 한국대표팀 사령탑에는 '독이 든 성배'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한국은 '작은 장군' 딕 아드보카트 감독을 불러와 본선에 임했다. 토고와 본선 1차전을 2-1로 이기며 원정 월드컵 첫 승을 기록했고 프랑스와 1-1로 비겨 16강 가능성을 한껏 끌어올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스위스전에서 피지컬에서 밀려 0-2로 패해 16강을 눈앞에서 놓쳤다.

아쉬움이 남는 대회였다. 2002 월드컵 4강 신화에 젖어 새로운 세계 축구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겉만 화려해졌다는 평가가 많았다. 과거의 영광을 잊고 철저한 반성으로 차기 대회를 준비하자는 교훈을 얻었다.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월드컵

기록이 깨지고 새 기록이 세워진 월드컵이었다. 계속되던 외국인 지도자 시대를 마감하고 '진돗개' 허정무 감독이 대표팀 사령탑으로 부임했다. 첫 출발이었던 칠레와 평가전에서 0-1로 패했지만 끊임없는 경쟁과 세대교체로 체질을 개선했다. '쌍용' 기성용(스완지시티), 이청용(볼턴 원더러스)이 대표팀의 중심으로 떠올랐고 박지성(퀸즈 파크 레인저스)은 주장으로 대표팀을 이끌었다.

한국은 최종예선에서 난적 북한,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UAE와 한 조에 편성됐다. 무엇보다 북한과의 경기가 난관이었다. 북한은 정치적인 이유로 홈 이점을 버리면서 제3국 경기로 한국을 상대했다. 중동 원정의 악조건은 말할 것도 없었다. 고지대에 건조한 사막 기후 등 모든 것이 최악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사우디 원정 경기에서 2-0으로 이기며 19년 무승 징크스를 털어내는 등 중동 텃세를 이겨내고 조기에 본선행을 확정했다. 남은 것은 북한과 사우디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었고, 결국 한국과 북한이 사상 첫 월드컵 동반 진출이라는 의미있는 기록을 만들어냈다.

남아공에서 열린 본선도 경쾌했다. 그리스를 2-0으로 꺾었고, 아르헨티나에는 1-4로 완패했지만 나이지리아전에서 박주영의 프리킥골이 터지면서 2-2 무승부로 원정 첫 16강에 올랐다. 16강 우루과이전에서는 공격적으로 나섰지만 아쉽게 1-2로 패했다.

한국은 8강에 오르지 못했지만 투혼을 보여주고 기술적으로도 한 단계 성숙하며 다음을 준비하게 됐다. 이후 박지성, 이영표가 대표팀에서 은퇴했지만 기성용, 이청용 등 젊은피들이 건재하고 구자철(아우크스부르크), 손흥민(함부르크), 김보경(카디프시티) 등 새로운 재목들의 등장으로 2014 브라질 월드컵을 바라보고 있다.

조이뉴스24 이성필기자 elephant14@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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