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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열 대담① "최동원 형은 라이벌 아닌 멘토"


"KS 4승 어떻게 하나…1982년 세계선수권 가장 기억 남아"

[조이뉴스24 류한준기자] 지난 7월 야구대표팀 사령탑이 발표됐다. 2018 아시아경기대회를 비롯해 2019 프리미어12·2020 도쿄올림픽까지 야구대표팀을 이끌고 갈 자리다. 앞으로 3년 동안 야구대표팀을 전임으로 맡기로 한 인물은 선동열 감독이다. 지난 2014년 10월 KIA 타이거즈 사령탑에서 물러난 뒤 3년 만에 다시 현장 지도자로 돌아온 것이다. 물론 선 감독은 그 기간 동안에도 야구와 함께했다.

2015년 처음 열린 프리미어12에서는 야구대표팀 기술위원회 기술위원로 활동했고 지난 2월 열린 2017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때는 대표팀 투수코치로 활동했다. 그는 오는 11월 16일부터 19일까지 일본 도쿄돔에서 열리는 '아시아 프로야구 챔피언십 2017'에서 첫 대표팀 지휘봉을 잡는다. '선동열호'의 출항이 임박한 것이다.

'조이뉴스24'는 창간 13주년을 맞아 선 감독으로부터 대표팀 운영 계획 맟 2020 도쿄올림픽 준비 과정 등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선 감독은 무엇보다 태극마크에 대한 사명감과 자부심을 강조했다. 그도 현역선수시절 청소년대표팀과 성인대표팀을 거치며 늘 유니폼 한쪽에 달았던 태극마크다. 선 감독은 "태극마크는 무엇보다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선 감독과 일문 일답

-현역 선수시절 소속팀 해태 타이거즈 뿐 만 아니라 KBO리그를 대표하는 명투수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특히 슬라이더를 잘 던지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선 감독께서 은퇴 후 지도자로 할동하면서 본 최고의 슬라이더를 던지는 투수는 누구인가요.

"우리나라 투수들 중에는 주 구종이 슬라이더인 선수가 많습니다. 저는 현역 선수 시절에 슬라이더를 두 가지 상황에 맞춰 던졌어요. 볼 카운트를 잡는 것과 결정구로 사용하는 것 이렇게 나눴습니다. 타자가 유리한 상황일 때는 횡으로 변하는 것 그리고 제가 유리할 때는 종으로 떨어지는 슬라이더를 던졌습니다. 최근 국내 투수들의 경우에는 변화구 구사 패턴이 예전과 다릅니다. 슬라이더에서 체인지업으로 변하고 있죠.

기본적으로 슬라이더는 거의 다 던지고 있는데 이제는 우리도 일본과 미국 야구 흐름을 따라 체인지업(포크볼도 포함될 수 있다고 선 감독은 덧붙였다) 위주로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긍정적이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KBO리그에서 현역 선수로 뛰고 있는 선수 중 한 명을 꼽으라면 김광현(SK 와이번스)이 슬라이더를 가장 잘 던지는 것 같습니다. 카운트 잡을 때와 결정구로 사용할 때를 잘 맞춰 두 가지로 나눠 투구를 합니다. 각도도 좋고 속도도 괜찮습니다."

-프로야구선수로 데뷔하기 전인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대회가 선동열의 이름을 알리는 자리가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대회를 계기로 제가 투수로서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됐다고 봅니다. 당시 언론에서 저를 두고 '대기만성형 투수'라고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해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미국·대만·일본 이렇게 세 경기에 선발 등판했는데 모두 완투승을 거뒀어요.

그때는 대표팀에서 최동원·김시진·임호균 형이 에이스였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경기에 제가 나가 던지게 됐어요. 당시에는 '내 뒤에 형들이 있으니까 편하게 던지면 된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결과가 좋았고 그러다보니 그대회를 통해 자신감을 크게 얻었습니다. 프로(KBO리그)에 데뷔한 뒤에도 좋은 선수로 잘 성장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제게는 그래서 정말 중요한 대회였죠."

-선수 시절 완벽한 투수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그래도 상대하기 어려웠거나 까다로운 타자는 있지 않았나요.

"거포형 타자는 오히려 상대하기 쉬워습니다. 제가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다보니 짧게 끊어 치는 유형의 타자들이 좀 더 까다로웠습니다. 투수가 던진 공을 잘 커트하고 그러다보면 투구수도 많아지고 그렇죠, 상대 전적도 제가 별로 좋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예를 들면 이정훈(전 빙그레 이글스·현 한화 스카우트 팀장) 김성래(전 삼성 라이온즈·전 한화 퓨처스 타격코치) 김광림(전 OB베어스-쌍방울 레이더스) 같은 교타자들이 제 공을 잘쳤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장타자들은 마운드 위에서 겁이 안 났어요. 풀스윙 하는 타자들은 빠른 볼에 밀린다는 느낌이 있기 때문인지 큰 것 한 방을 노리고 배트를 휘두르면 약점도 많이 드러납니다. 빠른공에 제구력까지 있었기 때문에 실투만 하지 않으면 거포를 상대로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예전부터 선 감독에게 라이벌을 꼽아달라는 질문이 많았습니다.

"라이벌보다는 내게 중요한 역할과 자극이 됐던 멘토들이 많았다고 생각합나다. 내가 좋은 투수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앞서 언급했던 1982년세계야구선수권대회랍니다. 최동원·김시진·임호균 형이 던지는 장면을 보면서 '아, 정말 국내 최고의 투수들이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어요.

'나도 꼭 저렇게 잘 던져야지'라고 마음억었습니다. 특히 (최)동원이 형처럼 던지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꼭 해봤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고 그목표를 갖고 앞만 보면서 달려온 것이죠. 저보다 4년 선배인데 '나도 꼭 잘 던지는 투수가 되겠다'고 늘 다짐했습니다. 동원이 형과 제 얘기가 영화(2011년작 퍼펙트 게임)로도 나오고 그랬지만 동원이 형과는 라이벌이라기보다 멘토였어요. 제가 프로에 데뷔한 1985년에는 선발 맞대결이 없었는데 이듬해(1986년)부터 3차례 만났죠.

솔직히 세 번 모두 이기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1승 1무 1패 결과가 나왔어요. 당시에 언론과 인터뷰에서 '동원이 형보다 연봉에서 1원이라고 더 받고 싶다'고 얘기를 했었어요. 1986년 개인 성적에서 제가 동원이 형보다 더 좋았기 때문에 호기도 부렸습니다. 그게 벌써 31년 전이네요. 정말 닮고 싶은 투수이자 저보다 뛰어난 선수가 맞습니다.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어떻게 하나요? 저와 직접 비교는 어렵다고 봅니다."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뛰었지만 메이저리그 진출에 대한 아쉬운 마음은 없었나요.

"청소년대표팀에서 뛸 때 우승을 차지한 1981년부터 메이저리그에서 영입 제의가 왔습니다. 1982년 세계선수권대회 우승 후에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런데 병역 문제 때문에 쉽지가 않았습니다. 해태 입단 전 실업팀 한국화장품에 먼저 갔던 것도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둔 결정이었어요.

당시 아마추어팀에서 5년을 뛰면 해외 진출이 가능한 조건이 있었죠. 1982년 세계선수권 우승 후에는 당시 다니던 고려대에 휴학계를 냈어요. 병역문제를 먼저 해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학교 측에서 제가 군대를 가려는 것을 알았어요. 군대를 다녀오면 학교를 해외로 나가서 다니려고 했었죠. 학교에서는 난리가 났죠. 휴학을 못하게 했습니다. 당시 시대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어요(웃음)."

-선수와 코치·감독으로 활동하는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언제였나요.

"아마추어 시절에는 아무래도 1982년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입니다. 일본과 결승전이 끝난 후 울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프로에 데뷔힌 이후에는 1986년 한국시리즈 첫 우승이 기억에 남습니다. 일본 진출 후 1999년 일본 센트럴리그 우승도 그렇고요.

그러고 보니 예로 든 세 차례 모두 우승을 확정지을 때 제가 마운드에서 공을 던졌네요. 1982년은 완투였고 1986년과 1999년은 마무리 투수로 뛰었네요. 우승을 확정했을 때 느낌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감독 시절에는 2005년 삼성에서 한국시리즈 첫 우승을 했을 때가 기억에 남습니다."

▶②편에 계속

조이뉴스24 류한준기자 hantaeng@joynews24.com 사진 이영훈기자 rok6658@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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