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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악마 해부] 붉은악마의 뿌리를 찾아서


 

전국민의 축제였던 2002년 월드컵에서 4강 신화를 이룩한 뒤 4년이 흘러 또 다시 월드컵 시즌이 됐다.

최근 아드보카트호에 승선할 23명의 태극전사들이 확정됐으며, 이제 한 달 남짓이 지나면 기다리던 독일 월드컵이 개막한다.

지난 월드컵에서 한국민들은 '다이내믹 코리아'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국민이 '비 더 레즈(Be The Reds)'를 외치며 붉은 옷을 입고 거리로 나와 한국팀의 선전을 기원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붉은악마가 있었다.

붉은악마는 대한민국 국가대표축구팀 서포터스 클럽이다. 국가대표 대항전이 열릴 때마다 골대 뒤 N석에 자리를 잡고 열정적으로 응원을 펼치는 그들은 2002년 전까지만 해도 그저 '특이한 사람들'에 불과했다.

이들이 '붉은악마(Red Devil)'라는 이름을 사용한지 올해로 꼭 10년 째다. 종교계로부터 계명 요구도 받고 있는 명칭 '붉은악마'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살펴보자.

◆ 대학로 칸타타 카페에서의 '칸타타 선언'

붉은악마가 어느 한순간에 모여 응원하기 시작하고, 자신들을 '붉은악마'라 명명했던 것은 아니다.

현재 붉은악마 고문직을 맡고 있는 신동민 씨가 쓴 '축구 서포터스 그리고 붉은악마'를 보면 당시 상황을 어느 정도 그려볼 수 있다.

1993년에 PC통신 하이텔에서 다소 추상적인 개념으로 '축구동호회' 모임이 생겼다. 이 모임은 국가대표팀에만 한정한 것이 아니라 프로축구까지도 모두 포괄하고 있었다.

이들은 동호인들끼리 함께 프로축구를 보러 다니며 우애를 다져갔다. 그리고 1995년 9월 28일 잠실경기장에서 열린 국가대표팀과 아르헨티나 보카 주니어스와의 게임에서 이들은 서포터석이라고 할 수 있는 골대 뒤쪽에서 응원했다.

같은 해 12월 16일 PC통신 축구동호회들의 꾸준한 오프라인 활동과 회원 증가에 힘 입어 대학로의 '칸타타'라는 카페에서 송년회가 열렸다.

이 곳에서 회원들은 우리나라 축구 및 관전 문화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나눴다. 이 곳에서 당시 하이텔 대표 시삽인 박중현 씨와 이은호 씨가 '칸타타 선언'이라고 명명된 문건을 발표했다.

'칸타타 선언'은 '일체의 영리를 배격하고 축구문화 발전을 위해 노력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칸타타 선언'은 오랫동안 붉은악마 활동을 한 회원들에게는 '한국축구의 독립선언서'로도 불리며 당시의 순수성을 기억하도록 하는 매개가 되고 있다.

◆ 초기 '붉은악마' 아닌 '그레이트 한국 서포터스 클럽'

1997년 하이텔 등 PC통신 동호회는 국가대표 축구팀 서포터스 클럽을 만들기 위한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했다.

국가대표 축구대표팀 서포터스 클럽의 첫 단체 응원은 1997년 6월 코리아컵 대회부터였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일사 분란한 응원 동작도, 응원곡도, 유니폼도 없던 상태였다. 각자 응원하는 프로팀의 유니폼과 머플러를 가져왔다. 비록 겉모습은 초라했을 지 모르지만 이들의 열정은 결코 뒤지지 않았다.

1997년 8월 10일 열린 브라질과의 친선경기에서 이들은 처음으로 붉은색으로 유니폼을 통일하고 응원전을 펼쳤다.

당시 주축이었던 한 회원은 "나이키에서 유니폼을 공동 구매해 맞춰 입고 나갔는데 인원도 100명 남짓이었다"면서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할 정도의 파격성을 지닌 단체였다"고 그 때를 회상했다.

1997년 당시 19살이었던 황태혁 씨도 "당시는 응원단이라는 개념이 없어서 아르바이트생으로 오해받기도 했다"면서 "응원 도구 때문에 경기장 관리자와 싸우는 일도 다반사였다"고 말했다.

◆ 1983년의 영광을 다시...'붉은악마' 탄생

브라질과의 경기 후 국가대표 축구팀 서포터스의 명칭을 정하기 위한 본격적인 논의에 돌입하게 됐다. '붉은악마'라는 이름은 당시 회원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거론됐던 이름이다.

1983년 멕시코에서 개최된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 한국 대표팀은 4강에 올라 세계를 깜짝 놀래켰다. 당시 외신들은 우리 대표팀을 '붉은 악령' 등으로 불렀다.

'붉은악마'가 채택된 것은 다시 한번 우리나라 축구 대표팀이 세계 축구 정상의 반열에 오르기를 염원하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전국민이 붉은악마'라는 말까지 있었던 지난 2002년, 대한민국은 월드컵에서 4강 신화를 이룩했다.

신동민 씨의 '축구 서포터스 그리고 붉은악마'에 따르면 당시 거론된 이름들로는 '레드 일레븐', '크림슨 타이드', '레드 워리어즈 서포터스 클럽', '레드 프린스', '레드 타이거', '레드 빅터스', '태극 한국', '대한', '레드 유니온 코리아', '레드 히어로즈 서포터스 클럽', '레드 헌터스', '태극전사', '붉은영혼', '레드 웨이브', '싸나이' 등이 있다.

◆ 유럽 축구 선진국 서포터스 참조

붉은악마 생성 초기에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했다. 응원곡도, 응원 방법도, 응원 도구도, 아무 것도 마련돼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다고 이들이 모두 돈 많고 할 일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

단지 축구가 좋아서, 대한민국에도 축구 문화라는 것을 만들어 보고 싶었던 사람들이 자신의 시간과 돈을 들였다.

당시 회원들은 유럽 축구 선진국의 응원곡이나 방법들을 참고해 우리만의 응원 문화를 만들어 나갔다.

한 회원은 "독일의 FC 한자 로스토크라는 팀의 응원 CD를 구해서 많이 참조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에는 해외 경기를 우리나라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해외에 나갔다 들어오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비디오 테이프를 구해 경기를 보기도 했다"고 말했다.

◆ 첫 해외 원정 '도쿄대첩'

붉은악마 원년 멤버들이 가장 많이 기억하는 경기는 역시 97년 소위 '도쿄대첩'이라고 불리는 1998년 프랑스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 일본 어웨이 경기였다.

붉은악마 집행부가 결성된 후 처음으로 가진 해외 원정 경기였다. 국내에서 출발한 47명은 경기가 열린 도쿄 요요기 경기장에서 합류한 회원 10여명을 비롯한 현지 교포, 기업체 이벤트에 당첨돼 응원 온 사람들, 연예인 응원단과 함께 응원전을 펼쳤다. 한국 관중은 약 5천여 명이었다.

당시 원정에 참여했던 황태혁 씨는 "한국에서 출발한 47명이 달랑 버스 하나에 모두 탔는데 경기장에 도착했더니 온통 파란색 일색이었다"면서 "두려움에 경기장 앞에서 못 내리고 몇 백미터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워야 했다"고 말했다.

황태혁 씨는 "경기장에 들어가기 앞서 버스에서 내린 곳에서 다함께 밥을 먹었는데 밥이 넘어갈 리가 있었겠나"면서 "우리끼리 윤봉길 의사가 도시락 폭탄을 던질 때 심정을 알겠다고 농담처럼 말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일본 국가대표 축구팀 서포터스의 울트라 니폰의 상징색인 파란색이 경기장을 메우고 있어 결전을 앞두고 '두려움'에 떨었다는 것.

2 대 1의 승리를 일군 일본경기는 이민성 선수의 결승골로 인한 극적 승부로 '도쿄대첩'이라 명명됐으며 붉은악마의 존재를 알리는 데에도 크게 공헌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붉은악마는 그라운드의 12번째 선수로, 선수들과 함께 경기장에서 호흡하고 목이 터져라 응원하면서 '서포터스'로서의 자신들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조이뉴스24 이설영기자 ronia@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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