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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캔 스피크', 김현석이 제일 잘 하는 것(인터뷰)


"가만 있었다고 면죄부 얻는 건 아냐"

[조이뉴스24 권혜림기자] 시사를 통해 첫 공개된 순간부터 호평이 쏟아져 나왔다. 핫한 패키지의 필수 요소인 톱스타 멀티캐스팅이나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한 스펙터클이 없이도, 영화 '아이 캔 스피크'(감독 김현석, 제작 영화사 시선, 공동 제작 명필름)는 2017년 하반기 한국영화계의 유의미한 수작으로 언급되고 있다.

세상 누구도 몰랐던 이야기를 하는 영화도 아니요, 엄청난 반전으로 '스포 경계령'을 발동시키는 줄거리도 아니다. 역사적 비극, 그리고 현재 진행형인 비극을 이제까지와는 다른 시선으로 다루는 관점의 전환이 '아이 캔 스피크'의 미덕이자, 재미 요소다. 교훈적 메시지에 더해 옅게 밴 소금간처럼 부담 없는 유머는 추석 대목 가족 영화로도 손색이 없어보인다. 그리고 관객의 칭찬을 받아 마땅한 이 영화의 중심에는 뚜렷한 자기 색채로 충무로를 누벼 온 김현석 감독이 있다.

'아이 캔 스피크'는 민원 건수만 무려 수천 건, 구청의 블랙리스트 1호 도깨비 할매 옥분(나문희 분)과 오직 원칙과 절차가 답이라고 믿는 9급 공무원 민재(이제훈 분)의 이야기. 결코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상극의 두 사람이 영어를 통해 운명적으로 엮이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다.

이미 알려졌듯 극 중 옥분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다. 뛰어난 극본과 연출, 배우들의 열연으로 호평을 얻은 '눈길', 흥행과 공분을 동시에 일으킨 '귀향' 등이 위안부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야기로 관객을 만났었다. 하지만 '아이 캔 스피크'는 앞선 두 영화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소재와 인물을 마주한다. 옥분은 무기력한 피해자가 아니다. 또렷한 캐릭터를 지닌, 공동체에 영향력을 지닌 현재의 인물이다. 영화는 일련의 사건들을 겪은 옥분이 자신의 언어로 직접 과거를 말하게 되는 과정을 흥미롭게 그려낸다.

연출을 맡은 김현석 감독은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 '스카우트' '쎄시봉' 등을 연출한 중견 영화인이다. 적절한 유머와 페이소스를 섞은 인물들, 배경과 사건들 사이의 절묘한 연계는 그간 김 감독 영화들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특징들이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잘 하는 어떤 것을 활용해 역사 속 피해자로만 남을 뻔했던 캐릭터에 맑은 숨을 불어넣었다. 무거운 소재를 보듬는 가벼운 터치가 관객들의 마음을 건드릴 준비를 마쳤다.

"이야기를 만드는 방식,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서 더 좋았어요. 개인적으로는 10년 전 영화 '스카우트'로 광주항쟁을 코미디로 풀어낸 적이 있잖아요. 말로 하면 이상하게 들리기도 해요. '광주항쟁을 코미디로 만든다고?' 같은 거죠. 이 영화도 마찬가지였어요. '위안부 피해자 이야기를 코미디로 만들어?'라는 반응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런데, 경우에 따라선 그 방법이 더 효과적으로 다가갈 수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욕심이 생겼어요. 자신 있는 부분이었지만, 막상 해보니 어렵기도 했죠.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어떤 사건을 더 많이 알게 됐을 때, 우리는 그것을 더 무겁게 느끼게 되잖아요, 때로 화가 나기도 하고요."

'아이 캔 스피크'는 오는 21일 개봉한다.

이하 김현석 감독과 일문일답

-옥분 역 나문희의 연기에 대한 호평이 자자하다. 평범한 안부 인사 한 마디로도 보는 이를 뭉클하게 하는 장면들이 있더라.

"그게 우리 영화의 매력일 것 같다. 결과적으로 과거의 상처를 감추고 사는 인물이지만, 뭐랄까, 나문희가 대중에게 주는 이미지가 있지 않나. 늘 유쾌하고 주변의 할머니 같은 모습. '그런 할머니에게 이런 상처가 있었다니'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 같다. 나문희 선생님은 연기 자체가 '자유자재'다. 실제로 시나리오 속 이 역할은 캐스팅 회의 때부터 나문희였다. 떠올릴 다른 사람들이 몇 명 있겠지만, 나문희처럼 양쪽 감정의 페이소스를 연기할 수 있는 분이 없는 것 같다.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부터 '나문희 선생님이 하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시나리오 상 이름이 '나옥분'이 아닌가. 이미 나문희라는 배우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더라."

-영화의 도입부터 이문세의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이 종종 활용되는데 이유가 있는지도 궁금하다.

"첫 장면 민재의 출근 신은 원곡 전주를 넣었다. 전주가 마치 국민체조 음악 느낌도 들고 어울리더라.(웃음) 노래를 넣는 것이 비싸기도 하고, 나는 그 노래의 세대이다보니 '누구나 아는 노래'라 생각해 넣을 생각은 못했었다. 그런데 투자사에서 그 곡을 삽입하면 어떻겠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넣어보니 재밌더라. '쓰자고 했으니 쓰지 뭐' 했다. 한 소절 쓰나, 전곡을 쓰나 가격은 같다.(웃음) 옥분과 정심(손숙 분)의 만남 장면과 진주슈퍼 앞 장면에도 삽입됐다. 그 곡을 아는 사람들은 '아까 그 곡이 나오는구나' 찾는 재미가 있지 않겠나."

-슈퍼 앞에서 민재와 옥분, 슈퍼 진주댁이 나누는 썰렁한 유머도 시사 후 화제였다. 사실 감독의 작품 속 인물들이 어딘지 얼빠진 느낌의 개그를 쳤던 것을 떠올리면 그런 '한 박자 늦은' 개그는 감독의 인장이 된 것 같다.

"전에도 코미디 영화를 많이 했는데 한 박자 늦은 코미디가 내 취향인 것 같다.(웃음) 이번 영화는 스케줄을 매우 바쁘게 소화해 오히려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할 수 있었다. 평소 내가 해온 코드로 코미디 느낌을 바꿨더니 위화감이 적더라."

-구청 직원들의 보신주의, 사소한 업무 에피소드들을 그린 대목들도 흥미로웠다.

"공무원을 희화화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대중에게 보이는 공무원의 이미지라는 것이 있지 않나. 큰 사건을 만들지 않으려는 성향이나 몸을 사리는 모습 같은 장면은 그런 관점에서 접근했다. 궁극적으로 위안부 문제를 다루려 하는데, 결국 민재나 주변인들의 시각 아닌가. 나도 이 영화를 하면서 나눔의 집과 수요집회에 처음 가 봤다. 대부분 속으로 변명을 하지 않나. '그동안 몰라서 그랬다'거나 '파헤치다보면 더 아파서'라고 한다. 그런데 변명이 올바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 있다고 잘한 건 아냐'라는 거다. 주변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 있었다고 해서 면죄부를 얻는 것은 아니다."

-옥분과 정심을 연기한 아역 배우들부터 주변 캐릭터를 그린 연기자들이 모두 고른 활약을 했다.

"아역들 중 성유빈은 실제로 '파파로티'에서 이제훈 아역을 했다더라. 둘이 닮아보이지 않나. 고등학교 2학년인데, 비슷한 또래 아이들이 오디션을 보러 다닐 때 성유빈이 압도적으로 잘 했다. 그 또래 오디션을 '올킬'한 친구라더라. 독립영화에 출연 중이라 스케줄이 어려웠는데도 우리가 기다려 촬영했을만큼 실력이 압도적이었다.

정심의 아역 이재인도 마찬가지였다. 어릴 때부터 연기를 한 친구였고, 그 또래 아역 배우들 중 가장 잘 했다. 옥분 아역 최수인은 '우리들'에서 연기가 너무 좋았다. 나문희 선생님과 닮은 부분도 있었다. 두 배우는 촬영 중 조금씩 실제로 자라고 있어서 장면 간 달라보이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다.(웃음)"

혜정 역 이상희는 '쎄시봉'에도 나왔다. 김윤석-김희애의 에피소드에서 방송국 작가로 나왔었는데, 김윤석과 김희애가 '대체 누구길래 저렇게 연기를 잘 하냐'고 했었다. 혜정 역을 40대 배우에게 맡기려 했는데, 이상희의 오디션 영상을 보니 너무 잘하더라. 나이 설정을 무시하고 이상희를 캐스팅하게 된 이유였다. 만족스러웠다.

염혜란이 연기한 진주댁도 비슷한 이유로 캐릭터가 어려졌다. 극 중 옥분에게 '형님'이라고 하니 최소 50대는 돼야 할 것 같았는데, 염혜란은 연극과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에서 나문희와 두 번이나 모녀 연기를 했었다. 당시 '도깨비'가 인기리에 방영 중이어서 염혜란의 활약을 듣기는 했다. 연기를 잘 하시지만 배역에 비해 너무 어려 망설이고 있었다. 그런데 연극계에서 정말 잔뼈가 굵은 배우더라다. 잘 하면 50대 느낌으로 만들어볼 수 있을 것 같아 밀어붙였다."

-옥분이 어머니의 묘소에서 한탄하는 롱테이크 장면도 관객들 사이에서 자주 회자될 신이다. 특별히 공들인 지점이 있는지 궁금하다. 진주댁과 옥분의 눈물 신도 그렇다.

"오히려 배우들을 믿고 카메라는 가만히 있었다. 묘소 장면도 그랬고, 진주댁과의 장면 역시 그냥 카메라 감독이 장비를 어깨에 메고 찍었다. 배우들이 잘 하면 배우들을 믿으면 된다. 혹시 다른 길로 가려 하면 방향만 살짝 알려주면 되는 것 같다. 내 연출 스타일이 대체로 그렇다.

오히려 옛날에는 내가 배우들을 이끌려고 한적도 있었다. 오히려 신인 때 그랬다. 그런데 '진짜 잘 하는 연출'은 잘하는 배우들을 캐스팅해서 가만 있는 것 아닌가 싶더라.(웃음) 다른 유혹을 버리고 연기 잘하는 사람들을 부지런히 보다가 '저 사람을 쓰자' 식이 되는 것 같다."

-엔딩 장면에서 옥분이 아베의 이름을 언급하며 최근 한일관계의 이슈를 언급하는 장면이 있다. 현실감 있었지만, 자칫 촌스러워질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런 결정을 한 이유가 궁금했다.

"사실 애매하게 '일본 총리'라고 할까 고민도 했는데, 느낌이 좀 다르더라. 실제 내용은 2007년 무렵이고 그 장면은 조금 지난 시점이다. 아베가 다시 장기집권을 하지 않나. 아베라는 이름이 주는 묘한 느낌이 있고, (한국인들에겐) 아베 하면 떠오르는 감정들이 있다. 실제 위안부 할머니들의 자료를 보면, 그 분들도 '일본이 사과 안할 거 안다'고들 하신다. 그렇다 해도, 적어도 이 문제에 있어서는 아베라는 이름을 꼭 짚어주고 싶었다."

조이뉴스24 권혜림기자 lima@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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