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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나의 거리', 배우 김옥빈을 뒤흔들다(인터뷰)


"박찬욱 감독, '연기 전환점 맞은 것 같다'고 격려"

[권혜림기자] '유나의 거리'는 분명 끝이 났는데, 눈 앞에는 드라마 속 유나가 그대로 앉아있었다. 질끈 묶은 머리카락과 도통 숨김이 없는 표정, 이런 저런 이야기를 털어놓는 말솜씨가 꼭 TV에서 막 튀어나온 유나의 모습 같았다. 배우 김옥빈은 아직 유나였다. 온 몸을 다해 삶을 껴안곤 했던 유나의 에너지는 여전히 김옥빈의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최근 50부를 끝으로 종영한 JTBC '유나의 거리'(극본 김운경/연출 임태우)는 팍팍한 일상을 살아가던 현대인들에게 단비같은 작품으로 남았다. '서울의 달' 김운경 작가가 집필을 맡으며 '현대판 서울의 달'이라는 기대를 얻기도 했지만 안방의 체감 반향은 그와 별개로 뜨거웠다.

소매치기범 유나가 사는 다세대주택에 성실하고 정직하기 이를 데 없는 남자 창만(이희준)이 들어와 살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유나의 거리'는 두 남녀 주인공들 뿐 아니라 이들의 주변 인물, 다세대 주택에서 저마다의 고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따뜻한 기운을 전했다.

지난 4월 방영을 시작한 드라마가 이달 초 종영했으니, '유나의 거리'는 제작진에게도 배우들에게도 대장정이었다. 심신이 지쳤을 법도 한데 김옥빈의 표정에서 피로는 찾을 수 없었다. 그와 마주하자마자 "지침이 없어보인다"는 말을 건넸더니, 김옥빈은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그는 "며칠전까지는 시체였다"며 "인터뷰를 하며 드라마 이야기, 연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다시 신이 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드라마 속 유나를 실제로 만난 기분"이라는 말엔 "저 역시 아침에 머리를 묶으며 '유나 같은데?'하고 생각했다"고 크게 웃으며 답했다.

자극적인 소재와 전개로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뭇 트렌디 드라마들과 달리, '유나의 거리'는 우리 주변에 실존할법한 친근하고 인간적인 이웃들의 모습을 담아 반향을 일으켰다. 김운경 작가의 필력에 배우들의 호연이 더해져 '다시 만나기 힘들 드라마'라는 찬사를 얻기도 했다.

"'아, 우리가 저렇게 살았었지'라는 향수, 우리가 잊고 있던 무언가를 자극해줬던 것이 아닐까 싶어요. 어린 시절 저는 임대 주택에 살았는데, 윗집과 아랫집을 서로 잘 알며 지냈었거든요. 지금은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마주치면 왠지 불편한 마음도 있어요. '유나의 거리'엔 요즘 세상과는 다른 옛스러움이 있었어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다시 느끼게 해 주고, 동화같던 시절을 추억하게 만들어줬죠."

그랬던 '유나의 거리'의 종영은 시청자들은 물론 김옥빈의 지인들에게도 큰 여운을 남겼다. 김옥빈은 "많은 분들이 트위터를 통해 '끝나서 아쉽다'는 감상을 보내주셨다"며 "연배가 높은 선배님들도 '잘 했다'고, '고생 많았다'고 칭찬해주시더라"고 말했다. 이어 "박찬욱 감독님 역시 '고생했다'며 '연기의 전환점을 맞은 것 같다'고 이야기해주셔서 너무나 고마웠다. 다들 보고 계셨다는 것 아니냐"고 눈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처음엔 '잘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어요. 정식으로 연기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니 더 배워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죠. 이희준 오빠는 학교와 연극 무대에서 정식으로 연기를 배운 분이니 보물창고처럼 아이디어가 많은 분이었어요. 한 신도 흘려보내지 않았죠. 조희봉 선배 역시 연극에서 다져진 기반이 있는 분이니, 그 분들께 '연극 무대에서 하는 연기는 어때요?'라고 자주 질문했어요. 드라마는 매회 대사가 바뀌고 새로운 연기를 해야 하지만 연극은 같은 대사를 매일 하다 보니 대사의 정수만 남게 된대요. 동료들과 함께 하며 연기를 더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어요."

사실 김옥빈이 연기한 유나는 소매치기를 직업으로 삼았던 인물이라는 점 외엔 딱히 흠을 잡기 어려운 캐릭터였다. 절도를 제외하더라도 무수히 많은 세상의 불의에, 유나는 기꺼이 제 할 말을 했다. 그를 따르는 후배도, 어여삐 여기는 어른도 있었다. 부모로부터 외면당한 어린 시절의 아픔도 건강한 영혼을 가리진 못했다.

"유나는 세상과 싸우며 쌓인 분노를 자신 안으로 향하게 둔 인물이었어요. 그래서 스스로를 망가뜨린 케이스였죠. 유나가 원망할 대상이 뚜렷하지 않았다는 점은 오히려 건강하게 사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 것 같아요. 개똥철학이긴 해도 세상을 사는 나름의 원칙도 있고요.(웃음) 사람에 대한 의리도 있고 정도 많죠. 창만(이희준 분)과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거예요. 다르게 살았지만 둘에겐 공통 분모가 있었잖아요."

유나와 창만의 사랑은 조급하지 않았다. 한 지붕 아래 살게 된 두 남녀의 사이엔 빠르게 불타오르는 연애 감정과는 다른, 연민과 존중에 가까운 감정이 먼저 스며들었다. 김옥빈은 "보는 분들은 답답하셨을 수도 있겠다"고 웃으며 말한 뒤 "그렇게 천천히 발전하는 연애는 이제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 아닌가"라고 답했다. 이어 "편지를 쓰고 답장을 기다리던 시대는 지나갔고 이제 1초 만에 문자가 오고 가는 시대가 왔다"며 "저 역시 빨리 답을 듣고 싶어하던 사람이지만 이번 드라마를 통해 기다림을 알게 됐다"고 덧붙였다.

김옥빈이 직접 꼽는 드라마의 명장면들 중에도 유나와 창만의 에피소드가 있다. 그는 "술에 취한 유나가 창만과 통화를 하며 자신과 미선 언니(서유정 분)를 데리러 오라고 도움을 청하는 장면이 있었다"며 "'나 유난데?'라는 대사가 너무나 귀엽게 느껴졌다. 그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라고 말하며 화통하게 웃어보였다.

"그 시기 창만과 유나는 서로 좋아하는 마음을 확인한 것도 아니었는데, 유나의 자신감이 정말 귀여웠어요.(웃음) 그 장면 말고도 좋았던 신은 너무나 많아요. 창만과 유나가 마지막에 오뎅탕을 끓여먹는 신에선 창만이 애교를 떨잖아요. '다른 드라마에선 수십 번 나왔을 장면인데 '유나의 거리'에선 마지막에야 나오는구나' 생각했죠. '천천히, 숯불 타오르듯 감정의 온도가 높아졌구나' 싶고요. 미선 언니와 대화 신에선 '사람들은 도둑질만 안 하면 착한 사람인 줄 알아'라는 대사가 있는데, 속이 다 시원했어요. 유나가 보육원을 찾아가는 에피소드에선 '착하다'는 칭찬을 듣는 유나가 '내가 착한아이인가, 칭찬을 들을 아이인가' 생각하는 장면이 있는데, 저도 눈물이 핑 돌았죠."

'유나의 거리' 이후, 김옥빈은 조금 여유로운 일상을 계획 중이다. 그는 "연기 외 다른 분야에서도 공부를 더 하고 싶어졌다"며 "다른 대학에 청강도 하러 가고 싶다. 철학과 국문학에 관심이 생겼다"고 말했다. "요즘 독서에 빠져 있다"는 김옥빈의 앞에는 파스칼 메르시어의 소설 '리스본행 야간 열차'가 놓여있었다. 틈이 나는 대로 짬짬이 책을 펼칠 모습이 자연스럽게 상상됐다.

"'유나의 거리' 이후 저는 긍정적이고 밝아졌어요. 사람을 보는 시선도 많이 변한 것 같아요. 제 인생을 사는 데 있어 멘토 같은 작품을 만난 것 같고요. '어떻게 사는 게 옳은가'를 많이 생각하게 됐는데, 남들의 시선보단 제 행복에 더 집중하게 됐어요. 먼 미래를 준비하는 것도 좋지만 현재 내가 사는 이 시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고민하게 됐죠."

조이뉴스24 권혜림기자 lima@joynews24.com 사진 박세완기자 park90900@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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