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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창간 13년] '벡델'을 넘어…韓영화 속 여성 찾기
여성 캐릭터 재현 방식 살펴보다
2017년 11월 04일 오후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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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뉴스24 권혜림기자] 한국영화계의 양적 팽창은 영화 콘텐츠의 창작과 제작 및 상영 환경 등 업계의 생태계를 돌아보게 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영화 관객 2억 명 시대, 1년에 300편 이상의 영화들이 제작되는 충무로에서 시장의 확장은 숱한 문제들을 진단할 표본의 확대를 의미하기도 했다. 다양성영화의 제한적 상영 환경, 스타시스템과 멀티캐스팅에 의존해온 한계, 스태프 노동 환경의 문제 등 한국영화계의 다층적 문제들이 바쁘게 수면 위로 올라왔다.

여성주의적 논의가 활발해진 최근의 시점에선 여성 캐릭터를 중심으로 한 콘텐츠의 부재, 여성을 재현하는 방식에 대한 문제제기가 한층 더 힘을 얻었다. 촬영 혹은 편집 과정에서 여성 배우를 대상으로 발생한 폭력적 사건들이 알려지며 성토와 자성의 목소리도 이어졌다.

특히 콘텐츠 내 여성의 모습을 재현하는 방식에 대한 논의는 올해 더욱 활기를 띠었다. 지난 8월 개봉작인 '브이아이피'와 '청년경찰' 등을 향한 관객들의 반응은 논란에 더욱 불을 붙였다. 여성을 잔혹한 범죄의 피해자로만 묘사한 최근의 영화들이 여성을 수동적 인물로 묘사해온 한국영화계의 관행을 한층 더 퇴보시키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영화계가 얼마나 남성 중심으로 치우쳐 있는지를 보여줄 지표로 간단하게 쓰이는 기준이 '벡델 테스트'다. 1985년 미국의 여성 만화가 엘리슨 벡델이 고안한 영화 성평등 테스트로, 이하 세 기준(▲이름을 가진 여자가 두 명 이상 나오는가 ▲이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가 ▲대화 내용에 남자와 관련된 것이 아닌 다른 내용이 포함돼 있는가)을 충족할 시 이 테스트를 만족하는 영화가 된다.

하지만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다고 해서 성평등 가치에 가까운 영화라 말할 수 있을리는 만무하다. 여성들이 주인공인 작품이라 해도 인물들이 성 역할 고정관념을 답습하거나 성별만을 전복해 남녀의 권력관계를 그대로 적용한 관계들이 그려진다면 '벡델 테스트'는 본질적 문제를 가릴 함정이 될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조이뉴스24는 올해 한국영화가 여성을 어떻게 재현해왔는지 돌아보기 위해 '벡델 테스트'를 최소한의 기준으로만 삼았다.

표본은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2017년 연간 박스오피스 50위권 내 한국 극영화 22편이다. 이 중 '임금님의 사건수첩' '보안관' '살인자의 기억법' '청년경찰', '하루' '해빙' '더킹' '공조' '장산범' '악녀' '아이 캔 스피크' '특별시민' '재심' '조작된 도시' '군함도' 등이 '이름을 가진 여성 두 명이 등장하는가'의 조건을 충족했다. 하지만 '이름을 가진 두 여성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지' '이 대화가 남성에 대한 내용 밖의 것인지' 등의 요건들은 '해빙'과 '공조' '장산범' '악녀' '아이 캔 스피크' '특별시민' '군함도' 등 일부 작품들만이 만족시켰다.

조이뉴스24는 '벡델 테스트'에 기초한 분류 결과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극 중 여성 캐릭터를 기반으로 여성을 재현하는 영화의 시선에 접근했다.



'벡델'도 못 넘은 영화들

표본 영화들 중 '브이아이피'와 '프리즌'에는 주요 배역 중 여성이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았다. 각 영화의 기준 충족 여부보다는 다수 작품들이 그리는 경향성에 집중하는 것이 유의미한 만큼, 남초 집단을 소재로 삼은 두 영화 속 여성 배역의 유무만을 따져 비판할 의도는 없다. 하지만 여성 인물들을 잔혹한 성폭력 혹은 그 외 물리적 폭력의 피해자로만 묘사한 지점은 비판의 대상이 될 만하다. 특히 '브이아이피'의 경우 '소녀' '요원' 등으로 표기된 여성 캐릭터를 이같이 재현해 비난의 화살을 맞았다.

천만 영화 '택시운전사'나 사극 '남한산성'은 실화 혹은 역사 속 기록을 바탕으로 한 작품들이라는 점에서 변명의 여지를 얻는듯 보이지만 '벡델 테스트'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택시운전사'는 남성 택시기사와 남성 기자, 남성 국정원 직원, 주로 남성들로 그려진 시민들의 이야기를 비췄다. 이 영화에서 이름을 가진 주요 배역은 만섭의 딸 은정 뿐이다. 배우 이정은이 연기한 인물은 이름이 아닌 '황태술의 처'로, 특별출연한 전혜진이 맡은 배역 역시 '상구 엄마'로 지칭됐다. '남한산성'도 마찬가지다. 영화 속 '김상헌'을 죄책감에 젖게 만드는 소녀 '나루'가 유일하게 등장하는 여성 인물이다.

그 외에도 5편 이상의 영화들이 '벡델 테스트'가 제시한 최소 기준조차 넘어서지 못했다. '살인자의 기억법'에는 '병수'의 딸 '은희', 병수에게 관심을 보이는 여성 '조연주', 특별출연한 채국희가 연기한 '장미옥' 등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두 명 이상 등장하지만 이들 간 유의미한 대화는 찾아볼 수 없다. 이에 더해, 언급한 모든 여성 캐릭터들이 '병수'와 '태주'가 저지르는 살인 행각의 대상으로 재현된다.

올해의 깜짝 흥행작 '청년경찰'과 '범죄도시' 역시 다르지 않다. 두 남성 경찰대생의 이야기를 그린 '청년경찰'에서 이들의 선배 경찰 '주희', 이들을 각성하게 하는 인물 '윤정'이 이름을 얻었지만 각각 남성 주인공들의 조력자이거나 여성 대상 범죄의 피해자로 그려졌다. '범죄도시'에서도 다방에서 일하는 여성 '안혜경'과 '룸살롱 마담' 등이 얼굴을 기억할만한 여성 배역의 전부다.

'벡델'에서 한 걸음 더

위에서 분류한 결과가 지나치게 도식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벡델 테스트'가 제시하는 양적·질적 기준을 보완하기 위해 각 작품의 여성 캐릭터가 '여성성'의 고정관념을 탈피하는 데 성공했는지 살펴봐야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흥미롭게도 이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영화 속 여성 인물 재현 방식의 진보 가능성에 희망을 품게 만드는 작품들이 있었다. 반면에 두 여성 인물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포함됐음에도 배역들의 성격이 너무 쉽게 전복성을 포기해버린 영화들도 존재했다.

'불한당:나쁜 놈들의 세상'(이하 불한당)은 긍정적인 예시가 됐다. 이 영화에서 '벡델 테스트' 아래 유효한 여성 배역은 단 한 명, 전혜진이 연기한 경찰 간부 '천인숙'이다. 이 한 명의 인물은 영화 속 대부분 주요 인물들과 갈등 관계를 맺으며 경찰팀장이라는 직업적 숙명을 끝까지 따라간다. '모성애가 강한' '수줍은' '사랑에 약한'과 같이 그간 여성 배역들을 가둬 온 관형어들과 거리가 먼 인물이다. 성 고정관념을 기꺼이 벗어나 최대의 활약을 펼친 인물이라는 점이 희망적이다.

'더 킹'에는 김아중이 연기한 '임상희', 정은채가 연기한 '박시연', 김소진이 연기한 '안희연' 등 유독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많았다. 하지만 주요 인물들이 남성 검사들이었던 만큼 여성 배역 간 유효한 대화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벡델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였다. 여성 캐릭터의 성평등적 재현에 집중할 때 '더 킹'의 유일한 미덕은 여성 검사 '안희연'에 있다. '불한당'의 '천인숙'과 같은 맥락으로, 직업적 유능함과 전문성에서 오는 여유는 성별에 앞서 '안희연'을 설명한다.



한계 너머의 희망

여성 인물이 전면에 나선 영화가 드물었던 가운데서도 '악녀' '장산범' '아이 캔 스피크' '특별시민' '군함도' 등 여성 주연, 혹은 공동 주연의 작품들이 올해 극장가에서 관객을 만났다. '벡델 테스트'를 통과했다는 점이 이 작품들의 공통점이지만 여성 재현의 문제 아래선 함께 분류되기 어렵다.

'장산범'과 '악녀'는 나란히 여성을 주연으로 삼았지만 극의 결말을 인물의 모성 혹은 사랑의 감정에 의지해 맺었다는 점에서 성별 고정관념을 재생산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특히 여성 액션물을 표방한 '악녀'는 장르를 변주한 도전에 나섰지만 그 외 주인공 '숙희'의 갈등과 결정으로부터 전복성을 읽어내기 어려워 아쉬움을 남긴 경우다.

반면 '특별시민'은 배역의 비중을 차치하더라도 여성 인물들의 성별 외 특성을 흥미롭게 관찰할 수 있는 영화였다. 서울시장 '변종구'의 권력 앞에 자신의 지식과 감각을 앞세워 대응하는 광고 전문가 '박경'은 최근 한국영화에서 만나기 어려운 젊은 여성 캐릭터였다. '변종구'와 관계를 맺는 또 다른 인물 정치부 기자 '제이'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주목할만한 인물이었다.

'아이 캔 스피크'는 올해 개봉작들 중 '벡델 테스트'의 기준을 가장 가볍게 뛰어넘은 영화다. 그에 더해 주인공 '옥분', 그의 이웃인 '진주댁' '혜정' 등의 관계를 통해 여성 인물들 간 이해와 연대를 적극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을 성취로 평가할 만하다. 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국가와 인종 이데올로기로부터 건져내 여성주의적 접근으로 끌어안았다는 지점도 기억해야 할 지점이다.

권혜림기자 lima@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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